진주만, 히로시마, 9·11···미국의 ‘전쟁 문화’가 만들어낸 보복의 부메랑

2025-01-09

전쟁의 문화

2001년 9월11일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납치한 항공기 두 대가 뉴욕시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충돌했다. 워싱턴에서는 펜타곤이 공격받았다.

사상 초유의 테러공격에 대해 미국인들은 반사적으로 ‘진주만’을 떠올렸다. 1941년 12월7일 일본 해군 소속 함재기들이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미 태평양 함대 함정들을 기습 공격해 미국을 충격에 빠트린 사건 말이다.

워싱턴포스트는 “(9월11일은) 오욕 속에 길이 남을 날”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진주만이 공격받았을 때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했던 말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일기에 “오늘 21세기의 진주만이 벌어졌다”라고 썼다.

2010년 출간된 <전쟁의 문화>는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과의 전쟁과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비교함으로써 정보 실패, 대량 살상, 과거에 대한 망각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의 전쟁 문화를 비판한 책이다. 2000년도 퓰리처상 수상작인 <패배를 껴안고>로 잘 알려진 메사추세츠공대 역사학과 명예교수 존 다우어는 “이러한 전쟁의 문화의 핵심에는 인종주의와 기독교적 메시아주의가 있다”는 점을 600쪽 넘는 분량을 할애해 치밀하게 논증한다.

1941년의 미국과 2001년의 미국은 모두 적의 위협을 사전에 감지했다. “두 경우 모두 상대방의 적의는 사전에 충분히 명백했으며 뿌리가 깊었다. 또한 암호가 해독되어 정보 전문가들이 오가는 비밀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양측 모두에서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곧 일어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미 해군 지휘관들은 진주만 공격 열흘 전에 워싱턴의 ‘전쟁 경고’ 메시지를 받았다. 알카에다 수장 빈라덴은 9·11 몇 년 전부터 미국을 상대로 지하드(성전)를 벌이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미국이 대응에 철저하게 실패한 원인으로 저자는 관료제의 비효율성과 ‘상상력의 실패’를 거론하는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후자 쪽이다. 저자는 미국이 일본과 알카에다의 공격 가능성을 간과한 것은 ‘백인의 오만’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진주만 공격 당시 태평양 함대 제독이었던 에드워드 키멀은 뒷날 의회 청문회 기간 중 “난 그 쪼그만 노란 개자식들이 일본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그런 공격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60여년 뒤 워싱턴 엘리트들 또한 “다언어를 사용하고, 지저분한 수염에 헐렁한 외투를 걸친 채 아프간 사막과 산악지대의 모닥불에 둘러앉아 있는 몇몇 아랍인 무리가 미국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쪼그만 노란 인간’ 사고방식이 중동으로 옮겨 간 셈”이다.

9·11 당시 미국은 민간인이 탄 비행기를 납치해 민간인 밀집 지역의 초고층 빌딩을 공격한 알카에다의 잔혹성을 비난했지만, 공포(테러)를 일으키는 고강도 공격이나 대량 살상으로 적의 전의를 꺾어버린다는 전술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시현했던 것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영국과 함께 독일 25개 도시 폭격에 참여했던 미국은 일본에서도 민간인들이 밀집한 주요 도시를 폭격해 “완전히 혼돈에 빠트리는” 작전을 세웠다. 1945년 3월9일 폭격기 334대가 도쿄에 소이탄 등 폭탄 2000톤을 퍼부었다. 공습으로 도쿄 전체 건물의 4분의 1이 파괴되고 사망한 시체를 치우는 데 25일이 걸렸다. “그 가운데 일부는 운하의 물길을 막고 있었다. 사람들이 불길을 피해 도망치는 와중에 흔히 이 수로에 뛰어들었다가 불 폭풍의 열기에 끓어오른 물에 데어 죽었던 것이다.”

이게 마지막도 아니었다. 미국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세계사에서 가장 끔찍한 폭탄”을 투하했다. 뒷날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여자와 아이가 아닌 군사적 목표물과 육해군 병사가 표적이 되도록 사용하라고 말했다”고 변명했고, 조지 마셜 장군은 “그들을 충격에 빠트려 행동에 나서게 하는 것이 퍽 불가피한 듯했다”고 털어놨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9·11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감행한 전술이 부메랑처럼 돌아온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충격과 공포’는 워싱턴의 전략가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이끌어 내어 럼즈펠드 휘하 펜타곤의 고정관념이 된 ‘군사 분야에서의 혁명’에 집어넣은 표어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약자의 현실적 무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극단주의 이슬람 신학자들은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가식적으로 이야기하는 자들, 예를 들어 영국과 미국이야말로 그 무기들을 처음 사용한 장본인”이라면서 “응징당한 대로 응징하라”는 쿠란의 말을 인용해 9·11을 정당화했다.

저자는 대량 살상을 정당화하는 보복의 논리는 “(기독교) 구약 전체에 팽배한 보복의 원리”이기도 하다면서 미국과 이슬람의 전쟁 문화를 모두 비판한다.

파괴적인 대량 살상이 당대 미국 언론에 하나의 ‘미적 체험’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는 사실은 더욱 곤혹스럽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동행 취재한 뉴욕타임스 기자 윌리엄 로런스는 폭격 한 달 뒤 공개된 기사에서 폭발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경외감에 사로잡혀 그것이 외계가 아닌 지구에서 나온 유성처럼 높이 솟아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불은 흰 구름을 뚫고 하늘로 치솟을수록 점점 더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것은 더 이상 연기나 먼지, 심지어 불의 구름도 아니었다. 그것은 믿기지 않는 우리 눈앞에서 태어난 생명체, 새로운 종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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