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AEO 제도의 진화와 과제

2024-12-13

(조세금융신문=고태진 관세사·경영학 박사) 글로벌 무역의 안전성과 효율성, 이 두 가치의 균형점을 찾는 것은 현대 국제무역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다. 지난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는 이 균형점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미국은 테러 이후 즉각적으로 테러리즘 방지법과 테러리스트 금지 계정법을 제정하며 국가 안보를 대폭 강화했다. 세관 검사도 더욱 엄격해졌다. 이 변화는 국제무역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전까지 효율성과 신속성에 초점을 맞추던 무역 환경이 안전과 보안 중심으로 급격히 전환된 것이다.

세계 각국은 미국의 대테러 정책에 동참하며 보안 체계를 강화했고, 그로 인해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무역 안전과 효율성의 새로운 해법, AEO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곧 부작용을 드러냈다. 강화된 보안 절차로 인해 물류가 지체되고 무역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무역 효율성이 크게 저하된 것이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다. 세계 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을 모색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미국의 C-TPAT(Customs-Trade Partnership Against Terrorism, 테러 대응을 위한 관세 및 무역 협력 체계)이고, 한국의 AEO(Authorized Economic Operator, 수출입안전관리 우수업체) 제도다.

이 제도는 무역 안전과 효율성이라는 상충하는 가치를 조화롭게 양립시키기 위한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무역업체를 선별하여 특별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보안은 강화하면서도 무역의 흐름은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업체에 대해서는 평소 까다로운 국경출입절차를 대폭 간소화하는 선택과 집중 프로세스다.

국제표준으로 자리잡은 AEO

AEO 제도는 신뢰할 수 있는 무역업체를 인증하여 간소화된 통관 절차를 제공하는 제도다. 한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연합(EU), 캐나다, 호주 등 전 세계 주요 무역국들도 유사한 제도를 도입했다. 이제 AEO는 단순한 무역 촉진 제도를 넘어 글로벌 무역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국가 안보가 최상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각국의 세관 당국은 AEO 인증을 받은 기업들을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정하며, 국제무역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다.

엄격한 심사와 다양한 혜택

AEO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법규준수, 내부통제시스템, 재무건전성, 안전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인 기준의 적정성을 검증받아야 한다. 이러한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기업들에는 통관 검사 간소화, 절차 간편화, 자금부담 완화 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엄격한 심사에 맞춰 그에 걸맞은 과실도 함께 주어진다.

이러한 심사 과정은 단순한 자격 검증을 넘어 기업의 전반적인 관리 체계를 향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많은 기업이 AEO 인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과거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했던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법규준수 역량을 강화하는 등 일종의 내부 혁신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AEO는 변화에 따른 불편함을 극복하고 혁신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내부 저항을 뛰어넘는 동력이 되었다.

국제 협력의 새로운 장, MRA

더욱이 국가 간 상호인정협정(MRA, Mutual Recognition Agreements)을 통해 한 국가에서 받은 AEO 인증이 다른 국가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 현재 12개국1)과 MRA를 체결하고 있어, 국내 AEO 인증기업들은 이들 국가와의 무역에서도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MRA는 글로벌 무역 환경에서 국가 간 신뢰를 구축하는 새로운 플랫폼이 되고 있다. 이 협정으로 기업들은 국제무역에서 더 큰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국가 간 무역 협력도 한층 강화되고 있다.

1) 미국, 유럽연합(EU),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일본, 호주, 대만, 인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제도의 그늘, 드러나는 악용 사례들

그러나 최근 이 제도의 맹점이 드러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최근 7년간 AEO 인증업체들의 법규위반 사례가 103건에 달하며, 그 금액만 5226억원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허위신고가 45건으로 가장 많았고, 밀수, 외국환거래법 위반, 부정수출입, 가격조작 등 다양한 불법행위가 적발되었다. 이런 위반 사례들을 통해 AEO 제도가 가진 취약점이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신뢰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이 제도가 오히려 불법 무역의 통로로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본성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떠올리게 하여 마음을 무겁게 한다. 실제 사례로, 한 업체는 특송통관 절차를 악용해 유독물질을 무신고 수입했고, 다른 업체는 할당 관세 추천요건을 충족하지 않았음에도 추천요건에 적합한 것처럼 허위로 서류를 작성, 추천기관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내 할당 관세를 부당적용(세율차 25%) 받아 50억 원 상당 관세를 포탈하기도 했다.

이는 AEO 제도가 오히려 불법 무역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한 실수나 과실을 넘어선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불법행위였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욱 크다. AEO 인증이라는 신뢰를 악용해 국가 안전과 재정에 심각한 위협을 가한 것이다.

제도 보완을 위한 정부의 대응

이에 정부는 AEO 제도의 관리 감독을 강화하고 있다. 관세청은 최근 ‘수출입 안전관리 우수업체 공인 및 운영에 관한 고시’를 개정해, 법령 위반 시 즉각적인 혜택 정지, 정기적인 통관 적법성 자율 검증 의무화 등 제도 보완에 나섰다.

이 같은 제도 개선은 AEO 제도의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고 당연한 조치다. 정부는 제도의 근본 취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악용을 방지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균형을 찾아서, AEO 제도의 미래

AEO 제도는 글로벌 무역의 안전과 효율이라는 두 가치를 조화롭게 구현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러나 일부 기업들의 제도 악용으로 인해 그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제도의 건전성을 유지하면서도 무역 효율성을 저해하지 않는 균형점을 찾는 것, 이것이 앞으로 AEO 제도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이제 AEO 제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제도의 근본 취지를 살리면서도 악용을 방지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욱 엄격한 관리와 감독, 그리고 첨단 기술을 활용한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 등이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인간의 본래 이기적이고 악한 성향을 지적하며 사회적 규범과 법의 필요성을 강조한 순자의 말이 떠오르며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느낌일까.

[프로필] 고태진 관세법인한림(인천) 대표관세사

• (현)경인여자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현)중소벤처기업부, 중기중앙회, 창진원, 경기TP, 인천TP 등 기관 전문위원

• (전)NCS 워킹그룹 심의위원(무역, 유통관리 부문), 월드클래스플러스사업 선정평가 위원

• 고려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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