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쫓겨 정신 없이 살다 보면 현실이 전부인 것만 같다. 그러나 조금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난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디즈니플러스)은 미국 건국의 주역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삶을 그리고 있다. 카리브해 외딴 섬의 빈곤층 출신인 그는 불굴의 의지로 자수성가한다.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이 되어 미국 초대 재무부장관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정적들의 견제와 스캔들로 벼랑으로 몰리다 결투 끝에 숨진다. 향년 49세였다.
힙합과 랩이 어우러진 이 뮤지컬의 전편에 흐르는 것은 역사의 관점이다.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은 해밀턴에게 충고한다. “누가 살고, 누가 죽고, 누가 우리 이야기를 전할지 자네가 정할 순 없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역사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게.”
그 영향일까. 해밀턴은 결투를 앞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역사에 남길 유산(legacy)을 고민한다. “유산이란…지금은 결과물을 볼 수 없는 씨앗을 정원에 심는 것 아닐까.” 총구를 하늘로 치켜든 그는 부통령 에런 버의 총탄에 쓰러진다. 해밀턴은 상대를 죽임으로써 자신이 세운 경제시스템까지 흔들릴 것을 우려해 일종의 순교를 택한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신의 거취가 당대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 스스로 훗날의 평가를 통제할 수 없더라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역사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통령 워싱턴이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깨끗이 물러난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가 먼저 죽었지만 대가를 치른 건 나였어.” 에런 버는 “역사 속의 악당이 되고 말았다”고 토로한다. 분명한 사실은 행동과 발언 하나하나가 에누리 없이 그대로 역사에 적힌다는 것이다. 역사는 때늦은 후회 따위 봐주지 않는다.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