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말 인천대 김철홍 교수가 ‘퇴직 교원 정부 포상 미신청자 확인서’를 냈다는 뉴스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정년 퇴임을 앞두고 정부가 주는 근정훈장을 받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무릇 훈장이나 포상을 함에는 받는 사람도 자격이 있어야 하지만, 그 상을 수여하는 사람도 충분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즈음 가천대를 시작으로 대학의 교수와 연구자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지역 단위의 선언도 이어졌다. 제주 지역 대학교수 70여명, 전북권 교수·연구자 125명, 그리고 29개 대학·2개 연구소·독립연구자 등 652명을 아우르는 부산·울산·경남 지역 교수·연구자들도 시국선언을 했다.
사람의 행동방식 대부분에는 역사적 배경과 기원이 있다. 시국선언을 한 이들의 행동은 생물학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심지어 우리 삶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인 ‘자본주의’에서 비롯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자본주의나 민주주의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 시대로부터 온 것이다.
조선은 정치체제 면에서 왕이 지배하는 왕조국가였지만 사회적으로는 ‘사대부’가 이끈 나라였다. 그 조선의 정치사회적, 문화적 모델의 기원은 중국 송나라였다. 그런데 정작 송나라 이후 이어진 원·명·청나라에서는 사대부가 주도하는 사회모델이 사라졌다. 대신 조선에서 더욱 정교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마치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어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인도에서는 사라지고 만 것과 비슷하다.
성리학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피터 볼(Peter K Bol) 교수는 송나라 때 중국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고, 송나라 지식인들은 ‘엘리트’와 ‘국가체제’에 대해 이전 시대와 달리 생각했다고 말한다. 송나라 이전 시대 엘리트는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국가 고위 관료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이었다. 정부 조직은 공동체의 유일하게 의미있는 영역이었다. 그들은 정치 권력과 사회적 권위를 동시에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들만 정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와 권위를 가졌다. 하지만 송대에 지방 ‘사회’가 광범위하게 발전했다. 이를 기반으로 등장한 사대부들은 국가체제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1058년 황제에게 제출한 상소문에서 유명한 정치가 왕안석은 국가의 변혁을 위해서는 정책을 만들 능력이 있는 ‘사(士)’를 키워낼 학교 시스템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주장이다.
송나라 유학자들은 어떤 황제도 그 지위 자체로 ‘천명(天命)’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없고, 사람들에게 도덕을 가르칠 권리가 권력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도덕적 능력과 권위는 학문 연구를 통해서 끊임없이 도덕성을 향상시키는 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은 ‘사’가 가져갔다. 도덕적 능력을 향상시키려면 황제도 ‘사’와 같은 방식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송나라에서 ‘사’는 정부 조직 밖에서도 정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들에게 황제는 피라미드의 정점같이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치의 쐐기돌, 즉 제자리에 있음으로써 그를 포함한 전체구조물이 안정을 찾는 존재였다.
조선의 사대부는 송나라 유학자들이 말했던 ‘사’의 정체성을 가졌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조선의 지식인 유생들이 작성했던 상소다. ‘만인소’는 이를 잘 보여준다. 만인소는 1만명 내외 유생들이 연명해 올린 집단적인 소(疏)다. 조선에는 1792년부터 시작하여 7번의 만인소가 있었다. 경희대학교·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문은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훼손된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도덕성을 추구하고 그것이 훼손되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조선의 ‘사’가 가졌던 자기 정체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