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처지를 과장하거나 비하한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재물보다 더 크고 많이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경우를 ‘자기 과시자(alazon)’라 하고, 실제보다 자신의 능력, 처지를 자꾸 축소하려 드는 경우를 ‘자기 비하자(eiron)’라 한다. 이 둘은 섞이기도 하고 겹치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우스꽝스럽긴 마찬가지여서 종종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자신이 조롱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허풍을 떨거나 엄살을 피우면서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지금 온 세상이 한숨 쉬며 목도하고 있는 이 희대의 코미디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일단 상대의 능력을 과장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축소한다. 대명천지 이십일 세기에 종북 주사파가 판을 치고 있다고 믿는 것이 모든 사달의 출발이다. 자기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 건전한 비판이나 이유 있는 반대가 아니라 그 뒤에 도사린 악마 탓으로 보이니 할 일은 병든 말이라도 잡아타고 돌진하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번 그 생각에 사로잡히고 나면 건전한 토론과 설득, 타협을 통해서 이견을 해소하고 국민의 여론을 얻어서 상대의 논리를 제압하는 일까지는 생각도 못 한다. 상대의 위협을 과장하고 자신을 왜소하게 여기는 전형적인 에이론의 모습이다. 게다가 과신하면 안 될 스스로의 능력을 느닷없이 과신한다. 마치 전지전능한 왕조시대의 망령이라도 쓰인 듯이 계엄령이라는 칼을 들고 쾌도난마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군대도 언론도 선량한 국민들도 계엄포고령 앞에서 모두 두 손 들고 납작 엎드려서 일순간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변할 것이라 생각한다. 알라존의 전형이다. 결국 대통령으로서 능히 할 수 있는 정치적, 법적 장치와 권한은 지극히 작게 여기고, 해서는 안 될 능력 밖의 일을 능히 할 수 있다고 믿은 게 그의 희극적 결함이다. 여느 희극이라면 주인공이 이처럼 허풍과 엄살을 반복하는 동안 관객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요절복통 재미를 느낄 터,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오싹하도록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걸 어쩌랴.
희극은 어떻게 흘러가고 끝나는가? 희극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취약한 처지로부터 벗어나고 더 나은 권력과 재물을 얻기 위해서 종종 간사한 계략(trick)을 쓴다. 이 간사한 계략 때문에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 모두는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고 주인공의 의도는 거의 성사될 뻔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늘 사필귀정, 간계는 폭로(revelation)되고 주인공은 뒤늦게 뉘우치거나 징벌을 받으면서 세상은 다시 평화를 찾는다. 12.3 내란이 실패한 이유는 자명하다. 애당초 있지도 않은 적의 위협을 과장하여 비상한 상황임을 선포하고 본인에게 불리한 여러 정황들을 모면해보고자 국가의 안위를 걸고 넘어지는 간계를 꾸렸으니 이길 리 없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영문도 잘 모르는 부하들을 억지로 동원했으니, 그 추악하고 얄팍한 본질이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대부분의 희극에서 주인공은 뒤늦게나마 뉘우친다. 자신의 오판과 잘못된 신념에 대해 사과하고 벌을 달게 받는다. 하지만 끝내 뉘우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본인은 물론 그 간계에 동원된 숱한 주변인들, 지켜보던 이들까지도 다치거나 죽는다. 이게 비극적 결말이다. 비극에서는 철저한 몰락 직전에야 간신히 깨닫는 걸 두고 ‘때늦은 알아차림’이라 한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이번 희극의 주인공은 뉘우칠 가망이 없어 보인다.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겁만 주려고 잠깐 군대를 동원해 봤을 뿐이라는데, 이 희대의 해프닝, 허술하기 짝이 없는 코미디가 비극으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과연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곽병창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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