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9) 전령(傳令)과 완문(完文)

2025-08-27

이번에 소개할 세계기록유산 등재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전령(傳令) 3건과 완문(完文) 2건이다. 전령(傳令)은 국왕 및 상급기관이 하급기관의 관리에게 또는 지방관이 백성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문서이다. 하달하는 내용은 상부의 명령, 군직과 관직의 임명, 행정적인 고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전령이 향촌에서 사용될 경우, 지방관이 실무적인 명령이나 처분 그리고 백성들에게 알려야 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백성들을 대상으로 경계해야 할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한글로 번역하여 전달하기도 한다. 수신자는 군문의 하부관원과 지방의 향촌 실무담당자인 풍헌(風憲), 존동(尊洞), 두민(頭民), 약정(約定), 면임(面任), 동임(洞任), 양반, 천인까지 다양한 계층을 포괄한다. 완문(完文)은 조선시대 관립기관이 향교, 서원, 결사(結社), 촌민(村民), 개인 등에게 어떠한 사실을 확인하거나 특전을 인정해 주기 위해 발급한 공문서이다. 완문의 발급자는 대부분 수령이지만 중앙의 상급관청에서부터 지방의 말단하급 관청 및 궁방, 서원, 문중과 같은 결사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존재하였다. 

△1894년 4월 4일 전령(傳令)

이 전령은 상주목사가 풍헌(風憲)과 각 리의 존동(尊洞), 두민(頭民)에게 1894년 4월 4일 보낸 것이다. 이 시기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하고 백산에서 대회를 개최하여 대규모 봉기를 한 직후이다. 이에 조선정부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전라도로 보내 중앙 정부 차원에서 진압을 진행하고, 의정부에서는 동비(東匪)의 철저한 토벌을 삼남의 수령들에게 지시하였다.

전령의 내용에 따르면 “이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각 면과 리에 신칙(申飭)해서 엄히 단속하고 각별히 탐문하여 만약 적발된 자가 있으면 군교(軍校)와 포졸(捕卒)을 많이 보내어 뒤쫓아 체포하고, 만약 저쪽의 머릿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으면 이웃 읍진(邑鎭)에 알려 관아의 포졸과 마을의 장정과 힘을 합쳐 남김없이 잡아들이기를 기약하되, 우두머리는 즉시 죽여 없애고 따르는 자는 낱낱이 엄하게 가두어야 한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을 체포하고 우두머리는 즉시 죽여 없애라고 하는 등 동학농민군 토벌의 기준과 방향을 모든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수령들은 산하 행정구역 책임자들에게 동비(東匪)를 찾아내 잡아 올리고 오가작통(五家作統)을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전령 말미에 “본면의 각 리는 다섯 집을 통(統)으로 만들고 통수(統首) 1명씩을 두되, 만약 동학의 무리들이 소란을 피우는 일이 있으면 모두 나가 힘을 합하여 결박하고 압송하여 올려보낼 것”이라고 하여 오가작통의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전령에는, 마을의 책임자인 존동(尊洞)과 두민(頭民)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고을이름과 산하 행정지역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화북(化北)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해 놓았다. 또 여기 전령에 ‘지시를 거행함에 있어서 조금도 느슨해서는 안 되지만 양호(兩湖)에서 체포를 엄하게 시행하면 저 무리들이 영남으로 도망쳐 흩어지는 상황이 반드시 올 것이다. 더구나 본 고을의 경내에 이러한 무리들이 많이 숨어 있음은 일찍이 들은 것이기에 서로 호응하여 폐단을 일으킬 우려가 또한 없지 않다.’라고 기술하였다. 여기 표시된 ‘화북’은 경상도 상주의 행정단위 이름이고 또 ‘영남으로 도망쳐 온다’는 표현은 상주가 충청도와 접경지역이므로 실제 일어나고 있었던 현상이다. 따라서 이 전령은 겸관인 상주목사가 풍헌(風憲), 존동(尊洞), 두민(頭民)에게 보낸 전령임을 알 수 있다.  

△1894년 11월 4일 전령(傳令)

 이 전령은 초토영에서 농민군 체포의 책임을 맡은 순포중군(巡捕中軍)이 하급 군졸인 집사(執事)에게 1894년 11월 14일 보낸 지시문이다. 이 시기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전한 이후의 시기로 한층더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이 세차게 몰아칠 때이다. 이 전령에 따르면 “어떤 동이건 막론하고 그 동에 사는 접주(接主)를 즉시 압송하되, 우선 그 동의 존동(尊洞)에게 염탐하게 하여 만약 혹여 동장(洞長)과 동의 사람들이 명을 거행하는 데 힘쓰지 않고 사적인 친분을 따라 일부러 놓아 준다면, 이는 바로 동도(東徒)의 남은 무리들이니 결박해 잡아 올리며 그 가산(家産)과 집물(什物)을 적몰(籍沒)하고 존동에게 압송하게 할 것”이라고 하여 접주는 무조건 잡아들이도록 하고 있으며, 동학농민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동도(東徒)’라고 규정하여 체포하도록 하고 있을뿐더러 그들에게까지도 가산과 집물을 적몰하도록 하여 동학농민군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당시 조선정부에서 접주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접주는 무조건 체포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1894년 전령(傳令)

이 전령은 한글로 작성되어 있다. 전령의 최종 수신자가 일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한글로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작성 시기는 1894년 말 또는 1895년 초로 추정된다. 작성자는 알 수 없으나 수신자는 ‘영솔관 개탁’이라 하여 영솔관으로 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접주를 반드시 잡아들이고 평민은 일절 작폐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접주를 숨겨준다면 마을 전체를 도륙할 것이라는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라고 되어 있다. 이와 함께 접주의 가산집물을 몰수하도록 하였다.

△1894년 11월 완문(完文)

1894년 11월에 나주목에서 해남 백포의 윤씨에게 발급해 준 완문이다. 이 문서는 완문의 형태로 발급한 일종의 물침표(勿侵票)라고 할 수 있다. 이 완문으로 벼슬아치들이나 토벌군들이 재산을 약탈하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 이 완문에 따르면 “해남(海南) 백포(白浦)는 윤씨의 세거지로, 선비다운 기품과 훌륭한 법도가 있어 동학도에 물들지 않았으니 매우 가상하다. 비록 난리로 어지러운 때이지만 특별히 안전하게 보호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여 해남 백포에 거주하는 해남윤씨들에 대해 동학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특별히 보호해야 된다고 하면서, 이를 보증해주는 증명서를 나주목사 이름으로 발급해주었다.

△1894년 12월 완문(完文)

충청도 단양군 어상천면 면장과 연곡리 집강 등이 마을 사람들에게 1894년 12월에 발급한 완문이다. 시기적으로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때이다. 충청도 단양군 역시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이 있었고, 이에 대한 토벌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완문의 내용은 충청도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 중곡에 사는 이건재가 동학의 접주였으나 우금치 패전 이후 집을 버리고 도망하자, 그의 재산 중 전답(田畓) 여덟 마지기를 마을 사람들이 토의하여 동학으로 피해를 입은 정선비에게 주기로 하였다. 특히 정 선비에게 준 것은 평소 이건재가 정선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완문을 작성한 이유는 훗날 이렇게 이건재의 재산을 정선비에게 준 것이 마을 사람들의 논의를 거쳐 이루어졌고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목적이었다. 이 완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에 동학농민군의 재산에 대한 몰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이를 처리하는 주체가 군현 단위뿐만 아니라 면 단위에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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