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더중플 - 6.3 대선주자 탐구
6.3 대선에 도전장을 내민 사람들. 나라를 맡겠다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들이 언제 어떻게 정치 무대에 올랐는지, 정치를 하기 전에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기억하시나요? 세월이 바꾸는 건 강산만이 아닙니다. 노래 가사처럼 사람들은 모두 변하고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추천!더중플은 ‘6.3 대선주자 탐구(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82)’입니다. 그들의 사상과 전략, 공약, 지지 기반 같은 것에 천착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탄생과 성장과 사랑과 투쟁의 이야기, 즉 땀냄새나는 삶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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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2002년 7월 초 어느 날 경기도 성남시의 한 아파트에 소포 한 상자가 배달됐다. 어린 두 아들과 살고 있던 김혜경(당시 36세)씨가 소포를 받아 들었다. 보낸 이의 주소는 성동구치소. 며칠 전 남편이 구속 수감된 곳이었다. 상자 안에는 몇 점 없는 남편의 소지품이 있었다. 온 세상이 뿌옇게 번지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남편의 소지품을 안고 한참을 울었다.
김씨는 제정신이 돌아올 때쯤 남편의 소지품을 하나 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갑이 눈에 띄었다. 1991년 결혼 직후 우연히 본 남편의 지갑 속에는 박종철 열사의 가족들이 울고 있는 보도사진이 들어있었다. 김씨는 당시 “왜 이런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냐”며 핀잔을 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편이 왜 그 사진을 품 속에 지니고 다니는지 모를 리 없었지만, 남편은 아내 말에 그 즉시 사진을 빼서 앨범에 보관했다. 기억 속 미안함이 다시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지갑을 연 김씨는 지갑 속 사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사진은 분명 가족사진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아니었다.
편한 변호사의 길을 두고 시민운동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한 남편이었다. 기득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며 매번 강한 상대와 싸웠고, 결국 검사 사칭을 공모했다는 혐의로 수배를 받곤 도피생활을 하다 구속까지 됐다.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은 없다시피했다. 집에 걸려오는 협박전화는 수시로 김씨를 괴롭했다. 그 중에서도 “애들 조심시켜라”는 협박은 견디기 어려웠다. 생명의 위협 속에 남편은 총기 소지 허가를 받아 6연발 가스총을 갖고 다니기도 했다.
이재명에게 30대는 시민사회운동으로 점철된 10년이었다. 1995년 창립한 성남시민모임(현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 활동의 핵심은 성남시의 시정(市政)·시의정(市議政)을 감시하고, 시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이재명의 첫 작품은 1996년 수도권 남부 저유소 건설 저지 운동이었다. 대한송유관공사가 200만 배럴 규모의 정제유 저유소를 성남시 대장동에 짓겠다는 걸 사고 우려와 환경 파괴 등의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공동대책위를 구성한 이재명은 성남시가 저유소 건축허가를 내주지 말 것을 지속적으로 압박해 3개월간 안전시설과 교통·환경영향평가 등을 거쳐 건축허가 여부를 결정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그러나 성남시는 돌연 입장을 바꿔 합의 후 5일만에 건축허가를 내줬다. 이 때문에 이재명은 저유소 건설에 함께 반대했던 주민들로부터 “이면합의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 멱살이 잡히기도 했다. 그는 이후 오성수 시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시장실 앞에서 농성을 벌였고, 그를 끌어내려는 시청 직원과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훗날 그는 “시민운동과 동네싸움을 구별하지 못한 치기였다”며 후회했다.
첫 작품이 실패에 가까웠다면, 두 번째 작품은 이재명 이름 석자가 전국적으로 알려질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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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하…이혼해야 하나” 이재명 지갑 속 사진 뭐길래 [이재명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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