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경험한 실패는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극복했나요’
이제 갓 사회에 나온 이들에게 입사 면접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질문이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실패의 수준을 조절하면서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휘한 자신의 강점과 회복탄력성을 강조할 지 모범답안을 연구한다. 이 같이 방어책을 학습한 이들은 사회적으로 한층 성장해 언론의 인터뷰를 마주하는 상황이 되어도 같은 질문에는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인 태도가 나온다. 어느 순간 기자로서 업무상 인터뷰를 할 때마다 실패 경험과 이로 인해 배운 것에 대해 집중하기 보다는 인터뷰이의 앞으로의 계획과 각오에 대해 초점을 두는 방식을 선호하게 됐다. 많은 인터뷰 기사의 제목이 미래형으로 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른 분위기를 감지한 것은 실리콘밸리 특파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이들은 실패의 경험을 나눌 때 눈빛이 활기를 띄기 시작하고 인터뷰 내용이 생생해졌다. 무엇보다 과거의 실패를 언급하며 깨달음을 나누는 데 사명감이 있는 것처럼 솔직하고 거침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인터뷰 속 인물의 입체성과 캐릭터는 더욱 뚜렷해졌다. 인터뷰이를 더 알아가기 위해서라도 살아온 궤적을 다룰 때 꼭 필요한 질문이 됐다.
최근 들어 깨달음을 얻게 된 부분은 우리가 던진 질문 속에는 ‘실패와 극복’ 사이에 ‘배움’이라는 전제가 빠져있다는 점이었다. 지난 28일 방한한 ‘자율주행의 아버지’ 세바스찬 스런 웨이모·구글X 창업자와 인터뷰를 할 때였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느냐는 대목에 이르러 그는 이 같이 대답했다. “내게 실패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오직 ‘학습(Learning)’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2004년 아무도 자율 주행 기술에 주목하지 않을 때 이를 시작했어요. 혁신을 할 때는 결과를 모릅니다. 이미 알려진 것이라면 혁신이 아니죠. 이 때문에 늘 실수하거나 잘못 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건 실패가 아니라 학습이라는 마음, 제 인생에서 세운 이 원칙이 큰 길잡이가 됐습니다.” 그러면서 같은 실수를 두 번 한다면 그것은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패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기에 실패에 대한 경험을 물었을 때 누군가는 방어를 하고 누군가는 그로부터 배웠던 점을 생생하게 나눌 수 있다는 차이를 느낀 순간이었다. 리더도 마찬가지다. 늘 실수하고 실패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리더의 실패가 조직의 실패로 확장될 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다. 기업이 성장한다는 것은 실패를 인정하고 새로운 배움을 얻어 이를 바탕으로 이전 단계에 갖고 있던 원칙까지 과감히 깰 수 있는 용기가 갖춰져야 하는 일이다.
원칙을 깨고 비로소 진짜 전설이 됐다
학습을 통해 원칙을 깨고 오랜 역사를 지닌 회사를 가장 경쟁력 있는 회사로 탈바꿈한 리더가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반세기에 가까운 업력을 자랑하는 벤처캐피털(VC) NEA((New Enterprise Associates)의 스콧 샌델 총괄 회장이다. NEA의 총 운용 자산은 250억 달러(약 33조원)에 달한다. 지난해까지 1589건의 투자를 집행했고 이 중 333건이 성공적인 엑싯으로 이어졌다. 엑싯 비율은 22%에 달한다. 270곳이 넘는 기업을 나스닥에 상장시켰다. 그는 1996년부터 이곳에서 일한 뒤 2016년부터 최고경영자(CEO)로 일하고 현재는 총괄 회장 겸 최고투자책임자(CIO)를 맡고 있는데 2000년대 초반 특히 세일즈포스, 태블로를 시작으로 서비스형소프트웨어(SaaS)와 클라우드 부문의 성장 가능성을 알아보고 이에 과감히 투자해 큰 성과를 냈다. 지금의 NEA를 만든 것은 모두 실패였다고 샌델은 지난 인터뷰에서 거침 없이 말했다.

교훈1. 특별한 사업 모델이라면 기존 가치 책정도 배제해야
그가 꼽은 첫 번째 실패는 이랬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전화가 왔어요. 우리가 투자를 받으려고 하는데 샌델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그 친구는 넷플릭스의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였다. 1998년 넷플릭스가 시리즈B 투자를 제안했을 당시 기업 가치 평가액은 5500만 달러였다. 사업 모델 자체가 뚜렷하고 온라인으로 확장 가능성이 높아 넷플릭스가 좋은 회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넷플릭스가 책정한 기업 가치는 샌델이 생각하는 금액의 두 배가 넘었다. 결국 샌델은 ‘너무 비싸다’는 판단을 내렸고 투자 기회를 다른 이에게 넘겼다. 넷플릭스는 이후 2002년 기업 공개(IPO) 당시 3억 달러의 시총으로 출발했고 현재의 시총은 5137억 달러에 달한다. 이후 1억 배 가까이 성장한 것이다. 이 실패에서 그가 얻은 교훈은 이랬다. “아주 특별한 사업 모델이라면 기존의 가치 책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 특히 끝없는 상승세(Unbounded upside)를 가진 기업의 경우에는 기꺼이 높은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

교훈2. 진짜 중요한 일이라면 무조건 직접 나서야
두 번째 실패도 뼈아팠다. 2005년 함께 기업의 이사회에서 활동하는 넷스케이프 창업자 짐 클라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사위인 채드 헐리가 창업을 해서 펀딩을 하고 있는데 영상을 온라인상에서 공유하는 플랫폼이야.” “이름이 뭐라고?” “유튜브라던데…”
이후 구글에 인수되면서 구글의 역사와 플랫폼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엄청난 기업의 탄생 소식이었다. 당시 샌델은 휴가 중이었다. 휴가 중이었던 그는 비서에게 채드 헐리와 투자 미팅을 잡을 것을 요청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 미팅은 성사되지 않았고 휴가 복귀 후에는 유튜브와의 미팅을 깜빡했다. 이후 며칠이 지난 뒤 경쟁사인 세쿼이어캐피털이 유튜브에 투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성사되지 않은 미팅이 기억이 났다. 이후 구글이 16억 달러에 유튜브를 인수할 때 세쿼이어캐피털이 44배에 달하는 수익을 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뼈아픔은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후로 그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위임하지 않고 스스로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 20년 간 중요한 건이라면 직접 처리했다. CEO와 회장이라는 직함을 달게 됐을 때도 이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교훈3. 과감히 오랜 원칙조차 깰 수 있어야 한다
뼈아픈 깨달음을 통해 그가 행동에 옮긴 것은 있다. 2002년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창업자가 NEA에 투자를 제안해왔다. 당시 신생 업체였지만 이 분야의 유망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누구나 투자를 하고 싶어하는 회사였다. 베니오프 창업자는 NEA에 투자를 제안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절대로 VC 앞에서 피칭(사업 발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 가지 조건은 매우 곤란한 부분이었다. 당시 NEA는 모든 파트너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업자의 피칭을 듣고 투자를 결정하는 오랜 원칙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원칙을 지키고자 고집하면 세일즈포스라는 기업을 잃을 수도 있었다. 샌델은 과감히 원칙을 깨고 이틀 동안 열두 명의 파트너 VC를 일대일로 만나 세일즈포스의 투자 가치를 설득했다. 결국 피칭 작업을 그가 일대일로 대신한 셈이다. 결국 열두 명 모두의 동의를 받아 추가적인 피칭 없이 투자 결정을 이끌어냈고 세일즈포스는 SaaS의 선구자로 NEA가 21세기에 기술 투자 부문에서 재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줬다. 샌델은 말했다. “회사가 아주 특별하다는 믿음이 있다면 때로는 오랜 원칙조차 깰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리스크에 도전하는 곳이니까요.”
이는 원칙을 깨는 것과 같은 조직적 변화가 리더의 결정 하나에만 달린 게 아니라 내부적인 공감대와 합의를 이루고 집단적인 위험 감수 능력에도 달려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NEA의 ‘관계에 대한 깊은 신뢰와 헌신’을 강조하는 문화는 이 같이 신속하고 기존의 틀을 벗어난 의사 결정도 가능하게 해 업력이 오래된 기업이 전략적인 전환을 추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창업자와 사람에 집중해 사람에 맞춰 원칙을 맞춰 대할 수 있는 것은 샌델의 개인적인 성향도 한몫했다. 그는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자신이 선천적으로 난독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른 VC들은 하루면 검토하는 서류를 아무리 읽고 읽어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한 때는 이런 속도로는 VC를 할 수 없다는 피드백까지 들었다. 이후 그는 읽히지 않는 서류 대신 사람을 직접 만나 질문을 하고 사람을 파고드는 방식을 택했다. ‘당신이 이 비즈니스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제품이 소비자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이 두 가지 기본 질문을 통해 누구보다 깊은 정보를 알아내고 창업자와 끈끈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리더도 실수해도 괜찮아…집단의 실패만 없다면
실패를 대하는 리더의 자세는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리더에게도 ‘실수해도 괜찮다’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해 심리적 안전감을 높일 수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는 실패를 쉽게 인정하는 자세를 중요시하고 리더도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구성원에게 주지시킨다. 그는 직원들과의 올핸즈 미팅에서 이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나는 거울을 보면서 내가 내린 결정의 핵심 전제가 여전히 타당한지를 살핍니다. 그렇지 않다 싶으면 곧바로 바꾸는 것도 제 일입니다.”
동시에 리더는 실수를 감지하고 이를 수정할 수 있는 일종의 학습 프로세스를 확립해야 한다. 실패에 대한 조사를 통해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머무는 게 아니라 ‘어떻게, 왜 발생했는지’를 이해하고 근본 원인을 파악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이후 이를 조직의 실패로 확장하지 않기 위해 실패의 교훈을 집단 지성으로 구축하도록 하는 게 중요한 작업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대하는 태도는 결국 학습의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실패를 '극복의 서사'로 포장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떤 관점을 바꿨는지를 스스로 성찰하고 공유할 수 있는 조직과 리더가 더 멀리 간다. 샌델이 말한 것처럼 실패란 단지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이 관찰하고 더 잘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다. 지금도 수많은 리더들이 자기만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터져나온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선언은 단순한 경영 구호가 아니었다. 삼성이라는 조직이 수십 년간 쌓아온 관성, 안일함, 형식주의의 ‘껍질’을 깨뜨리겠다는 의지였다. 그날 이후 삼성전자는 근본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품질 혁신, 인사 시스템, 글로벌 브랜드 전략 등 기업의 DNA 자체를 새로 설계했다.
병아리는 알을 깨야 세상 밖으로 나온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만든 원칙과 프레임에 갇힌 채 성장할 수는 없다. 진짜 배움은 그 껍질을 깨는 고통 속에서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