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 음력 5월2일, 김령이 예안현감으로부터 받아 든 조보에는 사헌부 헌납에 임명된 이상질의 상소가 실렸다. 인조가 추진하던 창경궁 수리 공사에 대해 “요역과 부세가 너무 많고 무거워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으니, 궁궐을 짓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면서 반대했다. 창경궁 수리에 대한 왕의 의지를 비판한 신하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 ‘곧은 언관’ 모습을 보여준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조의 궁궐 건설은 인조답지 않은 일이었다. 잘 아는 것처럼,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반정의 대표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어머니를 유폐하고 동생을 죽인 이른바 ‘강상(綱常)을 범한 죄’였다. 그리고 ‘무분별한 공사로 백성들을 힘들게 한 죄’ 역시 반정의 명분에 포함됐다. ‘무분별한 공사’는 광해군의 궁궐 건축을 지칭하는 말이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과 창경궁을 모두 불태웠다. 전쟁이 끝난 후 창덕궁(1610년)과 창경궁(1616년)을 중건해야 했고, 조선의 법궁에 대한 건축도 필요했다. 전쟁 이후 피폐해진 국가 경제는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만으로도 버티기 힘들 정도였지만, 광해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경궁 건립에 착수했다. 인왕산 아래 궁궐을 지으면 길할 것이라는 승려 성지의 권고에 따라 창경궁 중건이 끝난 이듬해부터 바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새문동에 새로운 ‘왕의 기운’이 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를 누르겠다고 경덕궁(이후 경희궁)을 건립한 이유였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이 된 게 왕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를 누르겠다고 궁궐을 지은 게 반정의 원인이 된 것은 분명했다. 광해군은 즉위한 이후 폐위될 때까지 궁궐 짓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국가 경제는 버티기 힘든 상황에 내몰렸다. 필요한 궁궐 중건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풍수와 무속을 이유로 인경궁과 경덕궁 창건까지 이루어지자 반정의 명분이 차곡차곡 쌓였다.
반정의 명분으로 인해 인조는 궁궐 짓는 일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인조가 창경궁 수리에 착수했다니, 의아한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광해군이 중건한 창덕궁은 자신의 반정 과정에서 불탔고(1623년), 창경궁 역시 그 이듬해 발발한 이괄의 난으로 피해를 입었다. 제대로 된 궁궐이 없던 탓에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의 집터에 지은 경덕궁을 거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632년 겨울, 궐내에서 저주의 변고가 있었다. 어떠한 변고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조선에서 궁궐 내 주술은 왕의 안위와 직접 관계되는 문제로 여겨졌다. 우선 왕의 처소부터 옮겨야 했다.
급히 창덕궁으로 왕의 거처는 옮겼지만, 복구되지 않은 창덕궁은 너무 좁아 오래 머무르기는 힘들었다. 창경궁 역시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반정의 직접적 명분이 됐던 인경궁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옮겨 가야 할 궁궐은 필요했지만 반정의 명분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인경궁 재목을 뜯어 창경궁을 수리하겠다는 기발한 계획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백성들의 요역과 부세를 걱정해 창경궁 수리를 반대하는 상소가 있었으니, 인조로서도 난감했을 터다.
6월3일, 새 대통령이 선출된다. 지금이야 선거 기간이므로 어떤 후보도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기는 힘들겠지만 6월4일이 되면 당장 어디에선가 대통령은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청와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고 용산 대통령실도 아니라 하니 난감한 상황이기는 하다. 무속과 주술 그리고 반정의 명분까지 복잡하게 꼬여, 광해군이 지은 궁궐 아니면 거처할 곳이 없었던 인조의 상황처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