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비가역적으로 흐른다는 것이 보편적 법칙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들어왔지만, 현재의 생생히 살아있는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흐른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개념에 불과하다. 미셀 프루스트는 “과거는 그 어딘가에 지성의 밖,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숨어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연히 그것과 만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차영자 수필가는 울산 문화재 보존 연구원으로 다년간 활동했다. 일하면서 마주한 과거는 그녀의 현재 속에서 시공간을 확장해나간다. 작가에게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다는 것은 편리성을 위한 객관적인 구분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유물 보존 업무를 할 때였다. 울산 장현동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직물 덩어리를 맡아 세척과 보존 처리를 하게 된다. 직물 분야의 전문가를 모시고 의견을 듣던 중 직물 덩어리는 ‘조선시대 철릭’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옷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존 업무를 끝내고 깨끗해진 무명옷을 보니 풍채 좋은 옛 선비의 모습이 그려진다.
“장현동 유적을 지나며, 철릭을 입은 단정한 모습의 선비가 말을 타고 나들이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선비가 그리움이 묻은 울산의 옛길을 신나게 달리기를 기원해본다. 그 길이 어느 쪽으로도 막히지 않는 순환의 길이기를 소원해본다.” -<장현동에서 찾은 철릭> 부분 p32
시대를 불문하고 여인상은 신비롭다. 생명을 잉태하는 몸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내는 매개체가 된다. 최근 지구촌은 전쟁으로 귀중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다. 인간 존중의 마음을 키워내야 하는 종교조차 폭력과 절망의 비극을 목도(目睹)하게 한다.
작가가 마주한 신석기 토제 여인상은 미래의 인간 세상이 궁금했는지 모른다. 고단했던 과거에서 오히려 현재의 인간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차영자 수필가는 “흙으로 만든 신석기 신암리 토우를 보는 순간 떨림이 왔다. 울산박물관 특별전에서 만난 <신암리 토우>가 어둠 속에 결박당한 채 서 있는 전라의 내 모습과 겹쳐졌다. 순간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내면이 허물어졌던 기억들을 깊이 되돌아보며 자판을 두드렸다.”라며 ‘작가의 말’을 통해 적고 있다.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에서 발견되었던 신석기 여인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전시된 여인의 몸매가 너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신암리 비너스’라 불리는 토제에 작가는 마음이 끌린다.
“얼마나 인간 세상이 궁금했으면 수천 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인연의 끈을 허락했을까. 그녀의 출생지인 서생면 신암리에 직접 가서 둘러보고 싶었다. 그곳은 해안선이 접해 있는 마을로, 바다를 무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 그녀는 신석기 유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 복제 여인을 만들어 여러 곳에 전시를 하고 있다.” -<신암리 비너스> 부분 p44
차영자 작가는 울산 향토사연구회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지역 역사유물에 대한 애정 깊음이 작품집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작가는 ‘태화강 유역 역사문화 알기’ 행사에 참여해 대곡천을 걷는다. 대곡천 구곡의 물 자락은 선사시대 공룡의 발자국, 신라 시대 왕족과 화랑, 고려 말 유배 생활을 하던 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 조선시대 여행가인 옥소 권섭 선생의 자취까지 시공간을 확장해나가며 풍성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선사의 길과 구곡천을 따라 왕복을 하고 선대인의 시를 음유하는 시간을 갖게 돼 행복했다. 포은 선생의 발자취를 자세히 알고 싶어 찾았던 이번 행사에 참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배 생활에서의 시름과 학문연마는 언양의 요도와 이곳 대곡천 구곡에서 날개를 달고 다시 나랏일을 하는 큰 인물로 성장하였던 같다.” -<대곡리 겨울 소묘> 부분 p 98
차영자 수필가는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울산 사람이 되었다. 2000년부터 <울산여성신문>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고 울산 중구청 명예기자와 울산문화관광 해설사로 일했던 작가는 지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울산 향토사연구회’ 회원으로 다년간 활동했으며 2001년부터 ‘울산문화연구원’ 연구생으로 입사해 2017년까지 근무했다. 울산여성신문 공로상과 울산중구청장상 그리고 울산광역시 시장상을 받기도 했다. 2019년 <계간문예> 신인상으로 등단한 작가는 현 울산 문인협회와 계간문예 문학회, 에세이울산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암리 비너스>는 작가의 첫 번째 작품집이다.
박가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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