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은 없다

2025-11-18

기아 화성공장에 현대차·기아 회장과 국무총리가 온다고 해서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동지들이 아침 일찍 긴급 선전전을 했다. 마침 내가 서울에 있어서 연대하러 갔다. 출근 시간이라 차가 밀리고 누군가 접촉사고를 내서 차 두 대가 길을 막았고, 우여곡절 끝에 늦었다. 도착해보니 공장 북문은 벌써 경찰과 경비노동자들이 다 막고 청소노동자 김경숙 동지와 연대하러 온 이수기업 동지들이 경비인력과 한바탕 충돌을 겪은 뒤였다.

그다음부터는 ‘버티기’였다. 현대차·기아 회장과 국무총리는 다른 입구로 들어가서 행사를 하고 있단다. (원고 쓰기 전 검색해보니 국무총리가 자동차 산업에 크게 지원을 약속한 모양이다. 참 좋겠다.) 우리는 그대로 현수막을 들고 발언을 이어가며 선전전을 했다.

북문을 막은 인원은 대부분 경비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도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그리고 하청업체 사장과 관리자들도 형광 조끼를 입은 경찰과 경비인력 옆에 오글오글 모여 있었다. 하청업체 관리자들이 잡담하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들렸다. 이것도 일종의 심리전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몹시 신경이 거슬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김경숙 동지와 기아 정규직지회에서 연대하러 온 동지들이 하청업체와 관리자를 규탄했다. 김경숙 동지는 같은 노동자인데 비정규직 노동자를 탄압하는 데서 권력감과 성취감을 느끼며 자본의 갈라치기를 돕는 하청업체 관리자들의 비겁함을 또박또박 짚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정규직은 이제 없다. 안전한 일자리는 없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연세대학교 출신의 미국 박사다. 내 아버지는 서울대 정규직 교수로 일하다 정년퇴임했다. 나는 12년간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학교를 그만뒀다. ‘스펙’도 논문 실적도 강의평가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규직 교수를 뽑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노동조건은 계약서부터 재고용 과정까지 정규직 교수보다 하청업체 소속 청소노동자 동지와 더 비슷했다. 실제로 어느 분야든 비정규직 동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 경험과 똑같은 부분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연대하는 동지들이 선전전에서 발언을 이어갔다. 자동차 산업은 이제 인공지능이 다 대체해 로봇들이 ‘스마트공장’을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인간 노동자는 지금의 3분의 1로 줄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인간 노동자가 없어지면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하는 사내 구내식당 근로자도, 청소노동자도, 경비인력도 필요 없어지게 된다.

기아 화성공장 북문 앞에서 같은 하청업체 노동자를 가로막고 히죽이죽 웃고 있던 하청업체 관리자들도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거대자본이 하청업체를 쓰는 이유는 비용이 싸기 때문이다. 그 싼 비용조차 안 들여도 된다면 하청업체를 굳이 고용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정규직이고 관리자라고, 내 통장에 매달 임금이 따박따박 들어온다고, 자본의 앞잡이가 돼 비정규직과 하청노동자와 취업준비생과 일용직과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를 비웃으며 연대를 거부하는 모든 노동자는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너희는 네 가문의 마지막 정규직이다. 너희는 정년퇴직하지 못할 것이다. 너의 자식과 손자와 그 자식과 손자들은 비정규직 일자리조차 찾지 못해 일용직으로 플랫폼으로 특수고용으로 떠돌게 될 것이다. 너희 탓이다. 너희가 자식들의 앞날을 막고 미래를 부수었기 때문이다. 자식과 손자들을 먹여 살리려면 너희는 임금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그 정규직 일자리를 목숨 걸고 붙잡고 자본의 노예가 되어 영원히 일해야 할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연대만이 살길이고, 연대만이 미래다. 비정규직을 철폐하고 노동자 존엄을 법과 제도로 보장받아야 모든 노동하는 사람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기아는 일반 청소노동자들에게 산업폐기물 처리를 명령했다. 청소노동자들에게 수시로 성희롱, 성폭력을 저질렀다. 국무총리는 그런 기업에 지원을 약속했다. 같은 하청업체 직원들이 동료 비정규직의 정당한 권리인 사내 선전전을 막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의 단풍이 아름다웠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쌀 포대 실은 트럭은 경비업체들이 들여보내주던데, 다음번에는 나도 쌀 포대를 트럭에 실어서 식당에 배달하는 척하고 잠입해볼까 궁리 중이다. 더 강력하게 기아 청소노동자 동지들과 연대할 좋은 방법을 상상해야겠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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