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원균의 차이가 있어요. 이순신은 일기(난중일기)를 남겼고, 원균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측근들에게 남긴 말의 요지란다. 물론 승장(이순신)과 패장(원균)이라는 점에서 찬사(이순신)와 비판(원균)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은 이순신에 비해 원균이 ‘만고의 역적’으로 전락한 이유 중 하나가 ‘이순신’처럼 기록을 남기지 않은 측면도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순신의 원균 뒷담화
한번 살펴보자. 먼저 이순신(1545~1598)은 <난중일기>에서 원균(1540~1597)을 80~120번 정도 언급했다.
“원균의 술주정에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니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1593년 5월 14일)
“왜적을 토벌하겠다는 공문을 보냈더니 원균은 ‘술에 취해 정신이 없다’고 핑계대면서 대답이 없었다.(1593년 6월11일)
“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려… 뇌물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아있다….”(1597년 5월 8일)
“‘원균…등이 서로 좋아하던 여자들을 모두 관계했다고 한다.”(1594년 1월19일)
지독한 뒷담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이순신 개인의 감정을 가감없이 담은 일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류성룡(1542~1607)의 <징비록>은 어떤가. 이순신을 천거한 이가 류성룡이었으니 원균을 좋게 표현할 리 없었다.
“1597년 3월 (삼도수군통제사에) 원균이 부임하자마자…이순신이 전략을 토론하던 운주당에서는 원균이 울타리를 치고 애첩을 데리고 기거…취중에 부하들을 함부로 다루니…원균의 명령이 무시되는 형편….”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도 원균 폄훼 기록이 상당수다. “왜적이 쳐들어오자…전함과 무기를 모두 바다에 가라앉히고 휘하의 수군 만여명을 해산시켰고”(1592년 5월1일), “…권신과 결탁해…이순신을 헐뜯자…조정에서는 대부분 원균을 편들고 이순신을 미워했으며”(1594년 12월1일), “…이순신을 몰아낸 원균은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을 모두 어육(魚肉)으로 만들었다”(1598년 4월2일)는 등의 기사가 잇따른다.
■선봉에 선 원균
그러나 선입견없이 실록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원균과 관련된 ‘선플’도 ‘뜻밖에’ 적지않다.
전쟁 초기에 경상 감사 김수(1547~1615)가 올린 장계(1592년 6월28일)는 “남쪽 변방을 침범한 왜적은 수사 원균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힘을 합해 잡았다.”(<선조실록>)고 했다.
전쟁 후(1603년 4월21일) 공신심사 과정에서 실록을 쓴 사관의 평가가 눈길을 잡아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서 왜적과 싸워…왜선 50여 척을 포획…그러나 그때에 계책을 마련하여 먼저 올라갔던 것은 모두 원균의 솜씨…이순신은 다만 달려와서 구원했을 뿐….”(<선조실록>)
■3대장이 지킨 바다
사실 전쟁 초기의 혼란을 겪은 원균은 곧 이순신과 함께 연합함대를 결성했다.(1592년 5월4일)
두 장수는 5월7일 옥포해전에서 왜선 30척을 불태우고 첫번째 전과를 세운 뒤 합포(7일)-적진포(8일)-사천(29일)-당포(6월2일)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6월5일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1561~1597)까지 전선 25척을 이끌고 합류했다. 명실상부 원균·이순신·이억기 등 3대장이 조선의 바다를 지키게 되었다. 이후 조선 해군은 당항포(6월5~6일)·율포(7일) 승전에 이어 유명한 한산대첩(7월6일)을 이뤘다. 왜군을 한산 앞바다로 끌어들여 학익진으로 공격하여 적선 63척을 불사른 것이다. 그후에도 1594년 10월4일 벌어진 장문포 해전까지 대략 14차례에 걸친 해전을 벌이며 남해바다를 지켜냈다.
■이순신의 ‘단독장계’ 파문
그런데 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원균을 ‘흉인’이라 욕했을까.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1일자에 이유가 나온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옥포해전)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천천히 하자’고 해놓고는 밤에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 없었던 원균에게 공이 없다’는 비밀장계를 올렸다. 원균이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유감스러워 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이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다투었는데….”(<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1일)
두 사람의 틈은 1593년 8월부터 더욱 벌어진다. 조정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때 원균은 선배로서 이순신의 부하로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1593년 8월1일)
■이순신·원균의 불화를 다룬 어전회의
그런 두 사람의 불화가 조정에서까지 거론된 것은 이듬해인 1594년 11월12일이었다.
즉 10월2일부터 시작된 거제도 2차 장문포 전투에서 통제사 이순신 휘하의 3도 수군과 의병장 곽재우(1552~1617)·김덕령(1567~1596) 등이 수륙양동작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왜군이 성을 굳게 지키며 나오지 않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이를 두고 조정에서 책임론이 불거졌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순신-원균’을 두고 저울질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때와 1년 7개월 후 재개된 두차례의 어전회의는 결과적으로 ‘이순신의 판정승’으로 귀결되었다. 물론 선조는 “이순신이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했다”면서 “심지어 동궁(광해군)이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았다”(1596년 6월26일)고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선조의 불신에도 이순신은 계속 통제사 자리를 지켰다. 반면 원균은 경상우수사직에서 물러나 충청도·전라도 병마사 등 육군직으로 돌았다.
■‘이순신’ 대안으로 급부상한 원균
그런데 1596년 9월 들어 상황이 급변한다. 명나라-일본간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일본군의 재침이 기정사실로 다가왔다.
이때 ‘임진년(1592) 이후 전투에 소극적’이라는 평을 들은 이순신의 대안으로 ‘원균’이 다시 급부상한다. 이후 <선조실록>은 일련의 어전회의에서 치열하게 벌인 ‘이순신-원균’ 논쟁을 중계한다.
특히 11월9일 윤근수(1537~1616)가 원균의 기용론에 불을 붙였다.
윤근수는 “제 몸을 잊고 용맹을 떨쳤으며 수전에 익숙한 자가 바로 원균”이라면서 “원균을 경상우수사나 경상도 통제사로 기용하여 이순신과 동급으로 놓아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윤근수는 이 대목에서 “마땅하지 않은 사람(이순신일 지칭) 때문에 호남의 길을 열어줄 우려가 있다”고 언급했다.
17일에는 ‘반 원균’ 인사였던 도체찰사 이원익(1547~1634)까지 “원균을 기용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원익은 “먼바다 운행을 위해 건조된 왜군의 배는 매우 얇으므로 배와 배가 부딪치는 당파작전을 벌이면 부서질 수밖에 없다”면서 “(그러한 당파작전에) 원균이 용감히 싸웠으므로 그를 반드시 기용하려 한다”고 아뢰었다.
■이중간첩 요시라의 반간계
그 와중에 이순신에게 불리한 돌발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그중 하나가 조선 조정이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와 요시라의 반간계 사건이다.
즉 요시라는 경상병사 김응서(1564~1624)에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를 사로잡을 계책이 있다”고 속삭였다.
요시라는 “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은 가토 때문인데 조선이 가토를 제거해주면 (그와 견원지간인) 고니시의 한도 풀리고, 조선의 근심도 풀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모월 모일 가토가 어느 섬에 머물 것이니 조선 수군이 잠복해 있다가 잡으라”고 했다. 이 정보에 따라 조선 조정은 통제사 이순신에게 출동 밀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속을 것을 우려해서’ 출동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가토가 수백척의 배를 이끌고 서생포와 다대포로 상륙했다는 보고가 잇달아 올라왔다.
‘요시라 사건’은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심지어 “(가토의 상륙 정보를 알린) 고니시가 ‘조선이 하는 일이 왜 그 모양이냐’고 애석해했다”(1월22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1월17일 올린 김응서의 장계는 “조선 수군이 가토의 수군을 맞아 치지 못했으니…민망하고 답답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순신을 원망한 것이다. 훗날 수정·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이것은)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던 일본측의 유인책이었다”(1597년 2월1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반간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이순신은 가토 기요마사의 상륙을 수수방관한 인물로 인식됐다.
■거짓보고로 판명된 ‘왜 군영 방화사건’
이순신에게 치명상을 가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이순신은 “1596년 12월27일 휘하 장수들이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불을 질러 가옥 100채와 화약창고 2개, 무기와 군량 2만6000여섬, 그리고 왜선 20여척과 왜인 24명이 불에 타 죽었다”는 군공을 보고했다.(<선조실록> 1597년 1월1일)
하지만 금방 거짓으로 드러났다. 1월2일 이조좌랑 김신국(1572~1657)은 “적진을 불태운 자들은 도체찰사 이원익의 명에 따라 작전을 수행한 군관 정희현과 그 심복 허수석이었다”는 장계를 제출한 것이다. 김신국은 “이순신은 휘하 부하들의 거짓보고를 믿고 조정에 알린 것”(<선조실록>)이라고 보고했다. 23일과 27일 잇달아 열린 어전회의는 ‘이순신 성토장’으로 변했다.
선조는 “왜추(고니시 유키나가)가…알려준 계책마저 놓쳤다…고니시까지 조선을 조롱했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을 지칭)가 편안히 누워 어쩔 줄 몰랐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윤두수는 “이순신은 나가 싸우기에 싫증을 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류성룡까지 이순신 비판에 가세
27일 회의에서는 이순신 교체론이 본격 거론됐다.
“이순신은…임진년 이후 한번도 거사 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다…원균으로 대신해야….”(선조)
이날은 이순신을 천거했던 류성룡까지 ‘이순신 성토’에 가세했다.
“…임진년(1592)에 이순신과 원균의 상급에 차이가 나서 저(류성룡)도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은 뜻과 기개가 교만해지면 쓸 수 없게 됩니다. (이순신이) 오랫동안 전투에 나서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죄가 있지만 전쟁 중에 장수를 바꿀 수 없다”(정탁)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원균 회의론’도 여전했다. 이정형(1549~1607)은 “전쟁 초기엔 공을 세웠는데, 군졸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고, 경상도가 다 분탕된 것은 모두 원균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선조는 “원균을 경상 우수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하니 이순신과 합심하여 해적을 섬멸하라”는 비망기를 내렸다.(28일)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
그런데 열흘도 안된 2월6일 세번째 돌발변수가 생긴다. 선조가 전격적으로 이순신의 파면 및 하옥과. 원균의 임명을 단행한 것이다. 선조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일까.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다만 이틀전(2월4일) <선조실록>에 그 단서가 나와있다.
이날 사헌부는 이순신의 죄를 열거한 뒤 “그를 잡아와 국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건의했다. 이때 선조는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했다. 또 선조가 이날 대신 및 비변사 당상들과의 조정회의에서 뜻밖의 대화가 오간다.
즉 공석이 된 공주 목사의 적임자를 찾는 중 선조가 “원균의 아우 원전(?~1597)이 어디 있느냐”고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이때 병조판서 이덕형(1561~1613)이 심상치않은 이야기를 보고한다.
“예전 이순신이 ‘원균이 조정을 속였다. 12살짜리 아들을 군공에 올렸다’라고 모함했습니다. 그러나 원균은 ‘내 자식은 나이가 18세이고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대질 결과 원균은 바르고 이순신의 이야기는 군색했습니다.”
그리고 이틀만에 이순신이 경질된 것이다. 선조가 1597년 3월13일 비망기로 밝힌 ‘이순신 죄상’은 4가지다. ‘조정을 기망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欺罔朝廷 無君之罪·①), 적을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縱賊不討 負國之罪·②), 남의 공을 가로채 무함한 죄(奪人之功 陷人於罪·③),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無非縱恣 無忌憚之罪·④)’였다. ①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을 잘못 보고한 죄, ②는 가토의 도해를 막지 못한 죄, ③은 원균의 장성한 아들을 어린아이로 잘못 보고하여 무함한 죄, ④는 출전명령을 무시하고 복종하지 않은 죄 등이다.
선조가 꼽은 이순신의 죄상에는 ‘원균의 모함’은 담겨 있지 않다.
■수륙 병진 작전(원균)vs 수군의 해로차단 작전(이원익·권율)
그렇게 이순신의 자리를 대신한 원균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전쟁 초기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선 일본군은 해안의 요처마다 왜성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부산 쪽의 적군을 쳐서 왜군의 침략을 막으려면 어찌해야 했을까. 왜성이 즐비한 안골포 방면이 아니라 거제도의 바깥 바다를 돌아가야 했다.
더욱이 무엇보다 부산포 부근에는 정박할만한 포구가 없었다. 이것은 조정의 거듭된 공격 명령에도 쉽게 움직이지 않은 이순신과 다르지 않은 판단이었다.
고심을 거듭하던 원균은 3월29일 일본군 공격 계획을 조정에 보고한다. 즉 “안골포와 가덕도 두 곳에…육군과 수군이 적진을 협공하여 적을 섬멸할 수 있다”(<선조실록> 1597년 4월19일)고 했다. 수륙 병진 작전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비밀장계를 올려 ‘원균의 수륙양동작전’에 반대의 뜻을 표했다.(5월8일) 도체찰사 이원익은 결국 원균의 ‘수륙 병진 작전’ 대신 ‘수군 주도의 해로차단 전술’을 채택했다.(6월10일) ‘해로차단’ 전술은 수군이 해로(부산 앞바다)를 봉쇄함으로써 왜군의 한반도 유입을 막고 육지의 적군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뜻한다.
■칠천량 비극의 시작
‘원균 vs 도체찰사·도원수’의 전술이 맞서자 조정은 모든 작전권을 도체찰사·도원수에게 주었다.
원균의 반발이 심했다. 6월26일 비변사는 “체찰사는 대신(大臣)이고 도원수는 주장(主將)인데도…수군이…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선조실록>)고 으름장을 놓았다.
비변사는 “지금 왜선이 대마도에 부지기수로 도착했는데, 만약 해로를 차단하지 않으면 적선은 거제도에 도착해서 그곳을 소굴로 삼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원균은 체찰사 및 도원수의 명을 따르지 않을 경우 명령불복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
6월18일 원균은 드디어 가덕도(부산~거제도를 잇는 섬)로 진군한다. 자발적인 출전이 아니었다. 도원수 권율의 장계를 보라.
“통제사 원균은…해상군사작전을 회피했습니다. 신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여러차례 호되게 나무랐고…급기야 체찰사의 독촉으로 겨우…그러나 진군은 원균의 마음이 아니었으며….”(<선조실록> 1597년 6월28일)
원균은 크고작은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출정했다. 원균 함대는 출전 당일 거제도 장문포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6월19일) 안골포(창원)-가덕도에서 첫번째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원균, 권율에게 곤장을 맞다
7월7일 원균 함대는 웅천(진해)에 모여있는 왜선 10여척을 부쉈지만 적의 증원부대가 몰려오자 한산도로 후퇴했다.
이때 도원수 권율은 원균의 철수를 타박하면서 자신이 머무르던 곤양(사천)으로 소환한 뒤 곤장을 쳤다.(7월11일) 선조도 “수군이 적을 무서워하고…억지로 출병했다가 앞다퉈 철군하고 있다”는 비변사의 보고에 “원균에게 ‘또다시 후퇴한다면 법대로 처벌할 것”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제 원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돌격 뿐이었다. <선조실록>은 “곤장을 맞은 원균은 반드시 패할 줄 알면서도 전면전에 나섰고, 결국 패전의 길로 들어섰다”(1597년 11월4일·1601년 1월17일)이라고 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결과는 참담했다. 실록 등이 전하는 칠천량 해전 관련 기사를 정리해보자.
억지로 출전한 원균은 7월14일 절영도(부산 영도)에서 적과 맞섰다. 그런데 왜군은 치고 빠지기로 아군을 지치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심한 풍랑까지 만나 아군 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에 원균은 남은 배를 수습하여 가덕도로 회군했고, 이때 심한 갈증을 느낀 아군이 앞다퉈 배에서 내려 물을 마셨다. 그 때였다. 육지의 왜군이 갑자기 나타나 기습하는 바람에 상륙한 조선군 400여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원균은 급히 배를 이끌고 영등포를 거쳐 칠천량으로 퇴각했다.(15일)
그러나 이곳에 수많은 적선이 몰려와 몇 겹으로 포위했다. 16일 새벽 왜군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원균은 힘껏 싸웠으나 대적하지 못했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먼저 도망가자 아군이 완전히 무너졌다. 전라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1536~1597) 등이 죽고, 원균은 해안(추원포)에 내렸다가 죽임을….”(<선조수정실록> 1597년 7월1일·<선조실록> 1597년 7월22일)
■모든 책임은 원균에게?
패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전투에 동원된 180여척의 조선 수군은 12척만 남기고 궤멸되었다.
일본 수군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했고, 서해로 진출했다. 이로써 전쟁 초기 온전했던 전라도의 곡창지대가 전쟁의 참화를 입게 됐다. 패전의 1차적인 책임은 당연히 현장 지휘관인 수군통제사 원균에게 있었다. 1598년 4월2일 선조와 비변사가 패전의 책임을 두고 의견을 교환했다. 이 날짜 실록의 사관은 ‘원균 책임론’을 개진한다.
“원균은 책형(磔刑·십자가형)을 받아야 하지만 다른 장졸들은 죄가 없다. 원균은…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고…큰소리 쳤다가…패하자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다.”(<선조실록>)
그러나 패전의 책임은 원균 혼자 오롯이 감당했어야 했을까. 선조는 처음부터 “…이번 패전은 원균의 출전을 독촉한 도원수(권율) 때문에 비롯된 것”(1597년 7월22일)이라며 권율을 지목했다.
그런데 패전 후 올라온 도체찰사 이원익의 장계(8월5일)가 기막혔다.
“이번 수군은 처음부터 전투로서 패한게 아니라…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던 사람들입니다…주장인 원균은 군율로 처단하고…이하 수령과 변장들도…모두 군법으로 처리할 것을 도원수 권율과 이미 의논하여 결정했습니다.”(8월5일)
전권을 위임받아 전투를 총지휘한 도체찰사와 도원수가 아닌가. 그런데 본인들이 ‘의논해서’ 책임자들의 처벌 수위를 ‘원균과 그 휘하 장수들’로 한정시켰다니….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원균은 패배의 모든 짐을 짊어져야 했다. 물론 그렇게 피해갔지만 도원수 권율도 거센 책임론에서 비껴갈 수는 없었다. 1597년 11월4일 사헌부는 도원수 권율을 사납게 탄핵했다. “도원수 권율은 칠천량 해전에서…조정의 명이 있다 해도 현장이 여의치 않으면 다시 대책을 세웠어야 함에도…경솔한 생각과 부질없는 행동으로 원균에게 곤장을 쳐서 독촉했습니다. 6년동안 구축한 수군을 단번에 무너뜨렸으니…권율은 ‘망국의 원수(元帥)’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전쟁 중에 도원수를 탄핵한 것은 지나치다”고 일축했다.
■“원균만 탓하지마라!”
그나마 원균을 이해하려던 이가 있었다. 바로 선조였다.
처음부터 ‘패전의 책임=도원수’로 지목한 선조는 기회있을 때마다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고 경고했다. <선조실록> 1601년 1월17일자가 눈길을 끈다.
“원균은 임진년에 이순신과 함께 적을 칠 때 싸움이 벌어지면 반드시 앞장을 섰다…칠천량 패전의 허물을 모두들 원균에게 돌리고 헐뜯고 있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조정이 재촉했기 때문이다.”(선조)
“남부 사람들은 원균이 모두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이라고들 했습니다…일에 임해선 강직했기 때문…통제사가 되었을 때 휘하 장수가 모두 이순신의 사람들이어서…원균이 고립되었습니다.”(도체찰사 이덕형)
“지금 원균의 수하로서 고관대작이 된 자들이 많은데 패전의 책임을 모두 원균에게 돌릴 수는 없다.”(선조)
■으뜸 공신으로 인정되었지만…
원균을 둘러싼 평가는 종전 후 이뤄진 공신 책록에서도 뜨거운 쟁점이었다.
선조는 기회있을 때마다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은 행주에서 승첩을 거두었다”(1604년 3월14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원균은 1등이 아닌 2등 공신으로 보고되었다.(<선조실록> 1604년 6월26일)
공신도감은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전에 참여했고, 뒤에는 패전의 과실이 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2등에 낮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원균을 2등에 두면 지하에서도 얼마나 원통하겠느냐”면서 “1등으로 올리라”고 명했다. 마침내 원균은 1604년 6월26일 발표된 ‘선무공신 1등’ 명단에 이순신·권율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패장은 맞지만…
물론 원균은 칠천량 대회전을 패전으로 몰고간 일선 지휘관이었다. ‘조선을 누란의 위기에 빠뜨린 패장’으로 손가락질 해도 달리 변명할 길은 없다.
반면 이순신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구국의 화신’으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 이순신’으로도 그 공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그런데 이순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원균을 천하의 악인으로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대로 원균은 스스로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든든한 후원자가 쓴 당대의 저작물도 없다. 하지만 원균에게도 들여다볼 ‘기록’은 있다. 그것이 국왕이 참여한 모든 어전회의와 각종 보고·상소문 등을 일자별로 빠짐없이 ‘기록’한 실록이다. 실록을 읽으면 어전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적나라한 발언 내용과, 그들의 표정,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다. 그 실록을 꼼꼼히 읽으면 원균이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이순신과 더불어 남해 바다를 굳게 지킨 용장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지난해 12월3일 계엄령을 선포 요건을 채우기 위해 열었다는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회의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새삼 ‘원균’을 위해 살펴본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구절들을 떠올린다. 실록이 없었다면 필자가 어찌 ‘원균을 위한 변명’에 나설 수 있었겠는가.
또하나, 역사는 12월3일 국무회의에 모인 국무위원들을 어떻게 표현할까. 공식 기록이 없으니 그때 모인 이들은 ‘불법·위법 게엄령의 부역자’로 손가락질 받을 수 있다. 도대체 그 회의에서 어떤 의견을 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마침 을사늑약 강제체결 120주년이 되는 2025년을 맞이했다. 이즈음 헌정질서를 파괴한 자들과, 또 그런 자들을 비호한 세력은 후세에 자칫 ‘갑진(2024) 오적’이나 ‘제2의 을사오적’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역사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이 기사를 위해 이민웅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이민웅, ‘정유재란기 칠천량 해전의 배경과 원균 함대의 패전 경위’, <한국문화> 29권29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2
김인호, <원균평전>, 평택문화원, 2014
이은식, <원균, 그리고 이순신>, 타오름, 2009
김경록, ‘임진왜란 시기 수군지휘관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비교’, <이순신연구논총> 11권1호,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2009
국립진주박물관, <정유재란>(특별전 도록),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