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대니얼 카너먼은 심리학자였지만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이단아였다. 그가 하버드대 캐스 선스타인 교수 등과 공저한 2021년 책 『노이즈』 리뷰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제목대로, 사람의 판단에는 인지적 잡음(noise)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는 게 핵심이었다. 가령 같은 범죄에 대한 한 판사의 판결이 오전 다르고 오후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은 그리 일관성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창안해 유통시킨 행동경제학의 인간상, 즉 경제 주체의 의사결정이 생각보다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라는 시각과 일맥상통하는 통찰이다.
연명의료 중단 서약 300만 넘어
어머니 스위스행 동행기 출간도
조력자살 법제화 합의 고민해야
카너먼은 평범하지 않은 죽음으로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는데, ‘안락사 천국’ 스위스를 선택해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의사가 제공하는 약물을 삼켰다는 얘기다. 신장 기능이 떨어졌지만 투석을 할 정도는 아니었고, 세상을 떠난 주에도 논문 작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을 앞당겼다.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의 비참(miseries)과 굴욕(indignities)은 불필요하다”는 신념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숨겨, 지난해 3월 27일 세상을 떠났지만 근 1년 만인 올봄 조력자살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4월, 철학자 피터 싱어의 뉴욕타임스 기고는 충격적이었는데, 카너먼은 죽음에 초연한 모습이었다. 팟캐스트에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는 e메일을 2024년 3월 19일 카너먼에게 보냈는데, 3월 27일에 죽을 계획이기 때문에 요청한 5월에는 가능하지 않다는 답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식의 잣대에 견줄 때 카너먼의 마지막 선택은 불합리해 보인다. 그는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지론을 일종의 소신공양을 통해 웅변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국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가 3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하지 않나.
멀리 갈 것도 없다. 죽음이 멀지 않은 부모를 두고 있거나 막 떠나보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떤 형태로든 ‘존엄한 죽음’에 긍정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약사이자 SF 작가인 김희선씨의 2023년 에세이 『밤의 약국』에는 ‘그를 위한 중력가속도’라는 글이 실려 있다. 막 약사가 된 ‘미래의 작가’를 찾아와 파킨슨병의 고통을 호소하던 고향 어르신이 끝내 겨울 산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곤, 우리에게도 조력자살이 허용됐더라면 어르신이 인간다운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을까, 공상하는 내용이다.
계엄 때문에 주목을 덜 받았지만, SF 작가 남유하씨가 올 초 출간한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는 말기암으로 고통받았던 어머니의 스위스행 동행기다. 1944년생인 남씨의 어머니는 2009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2019년 완치판정을 받았으나 2020년 가을 뼈 전이, 2021년 2차 뼈 전이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22년 여름 네 번째 척추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원래는 2023년 10월 말을 조력자살 디데이로 잡았지만 두 차례 앞당긴 끝에 8월 3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격해지는 통증을 그만큼 참기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에세이 제목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는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어머니의 생전 발언이었다. ‘내일’은 조력자살 이후를 뜻할 것이다.
남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엄마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으면 고통을 더 받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따르기는 했지만 딸로서 마음이 굉장히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존엄사 반대론자들은 자연스러운 죽음을 강조하는데, 의학의 발달로 완치가 불가능한데도 연명치료를 하는 상황이 이미 부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했다.
남씨는 요즘 조력자살 법제화 운동을 한다. 강연 요청에 응하고 국회의원들을 만난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이 의학적으로도 구분이 모호한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만 엄격하게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고 있어 입법을 통해 죽을 날이 언제일지도 모른 채 고통받는 말기환자들을 구제해주자는 게 요지다. 말기환자에게 스위스처럼 조력자살을 허용하자는 얘기다.
카너먼의 마지막 선택이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만큼 조력자살 법제화가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여러 부작용을 경고하는 의료계의 입장도 일리가 있다.
결국 공론화를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올바른 접근법 아닐까. 내란 척결, 통상 문제 등 굵직한 난제들이 쌓여 있지만 마냥 한가한 소리만은 아닌 게, 조력자살을 실정법이 가로막고 있는 한 제2, 제3의 남유하가 생겨날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