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호부터 10회에 걸쳐 그동안 필자가 보고 듣고 느꼈던 반구대 사람들, 그들의 소망과 욕망을 2020년부터 취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반구대특집 ⑧, ⑨회는 “대곡리 갑을남녀(甲乙男女) (1), (2)”, ⑩회는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크랭크-인”으로 마무리합니다.
반구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김소희 국창(國唱)의 고명딸인 박윤초 명창(名唱)이 아버지의 초대로 울산에 내려온 때이다. 아버지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화전놀이를 열었는데, 그해는 지금은 없어진 종하체육관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아버지 후배인 양원석 건축가와 박윤초 선생 내외가 때마침 그날 울산으로 내려왔고, 아버지는 예정에도 없이 박 선생을 무대 위로 초대했다.
그날 사물놀이패가 한차례 공연한 뒤였지만 박 선생은 그 큰 무대를 사물놀이패도 없이 마이크도 없이 홀로 장악했다. 그 며칠 전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 무대에서 전주의 한 명창과 크게 알려진 힙합 가수의 컬래버 공연을 본 감동이 가시기 전이었고, 어릴 때부터 동서양의 고전음악을 즐겨 듣던 차라 듣는 귀는 뚫려 있었던 덕분에 그 큰 공간에서 여리여리한 노인이 장악해 버리는 그 전율이 진하고 깊었다.
행사가 끝난 뒤 초대된 손님들은 반구대에 유일하게 남은 어느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아버지는 울산에서 태어나 외지로 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나는 10여 년 전 아버지에게 코가 꿰여 낯선 울산으로 와 눌러앉았다. 다 게으른 덕분이다. 아버지는 반구대를 깊이 사랑해서 외지에 나가 있을 적에도 종종 반구대를 방문해서 반구대의 변화를 꾸준히 목도(目睹)하며 대부분 도자 작품에 반구대를 담았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반구대 공간으로 들어갔다.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이런 단어들이 페르시아의 어떤 말처럼 낯설기 짝이 없어서 내가 도착한 곳은 대곡박물관이었다. 아버지는 올해 팔순이 넘었는데도, 수십 년 전의 울산과 지금이 굉장히 달라졌을 텐데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가 내게 전달이 잘 안될 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울산에서 산 지가 10년이나 됐으면서 지리도 지명도 모르고 말귀도 못 알아먹는 내게 ‘븅신’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2017년 5월 처음 반구대를 찾았고,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절경에 충격을 받았다
어찌어찌 암각화박물관을 찾아 올라가서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했는데 왼쪽 길로 들어섰다가 힘들게 차를 돌렸다. 솔직히 내비게이션은 오른쪽 길을 가리켰지만, 좁은 연로를 보면서 내비게이션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쪽으로 들어가기 싫었다. 이후로 수백 번을 오갈 줄 그때는 생각도 못 했다.
곰곰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세 가지의 감정이 혼재됐던 것 같다. 첫째는, 반구교를 넘어 집청정과 반구서원 앞을 지날 때 오른쪽으로 보이는 암석 절벽들이 소름 끼치게 아름다웠다. 둘째는, ‘귀차니즘’에다 게으르고 울산에 ‘븅신’이었던 내가 그 좋은 곳을 찾아다니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셋째는,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시작된 음식점 주인의 수다가 무척 거슬렸다.
한 달 뒤, 당시 준비하고 있던 <광대>라는 영화의 배경으로 아버지가 추천한 한실마을을 방문했고, 영화가 엎어진 뒤로 반구대를 잊었다. 2년 6개월 뒤의 겨울, 모든 사람의 핸드폰 전원을 끄고 긴밀한 회의를 할 일이 있어서 한밤중에 그곳에 갔고, 그날도 식당 주인은 했던 말을 또 반복해서 짜증이 돋았다. 그리고 한 달 뒤 코로나 시국이 시작됐다.



코로나 시국에 듣기 싫었던 손방수와 이재걸의 이야기가 궁금해 반구대를 다시 찾았다
학교를 오가는 서너 시간과 나갈 때 준비하고 들어올 때 정리하는 몇 시간, 모든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하니 시간과 감정이 절약되면서 잉여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뒹굴어도 시간이 남았다. 두 달간의 여름 방학이 이렇게 길었나 싶었다. 그러다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리던 어느 날 밤 9시쯤 손바닥만 한 캠코더를 쥐고 그 음식점으로 갔다. 그야말로 ‘갑자기’였다.
음식점 부부는 일과를 끝낸 뒤 지치고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그때, 하고 또 했던 얘기, 자세히 해보세요. 두 시간 넘게 여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가끔 TV를 보며 저쪽에 앉아 있던 남자도 추임새를 넣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 무렵이었다.
다음 날 성능 좋은 캠코더를 사서 줄기차게 오갔다. 했던 얘기를 또 해도, 앞뒤가 안 맞아도, 듣기에 이상하고 불편한 이야기도 다 들었고 다 찍었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을 즈음에 촬영을 중지했고, 12월에 18분 분량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그런데 편집하다 보니 이상한 점들이 있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부부의 인터뷰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지점들이 있었다. 파내다 보니 가족의 문제가 얽혀 있었다. 그래도 부족했다. 더 파다 보니 반구마을의 문제가 복잡했다. 또 부족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니 관과 기관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손방수는 어린 시절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았고, 어른이 되면서 이기적인 사람이 돼버렸다
그리고 12월 말, 새 이장 선거가 있고 난 다음부터 나는 그 이상한 점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반구대에 깊숙이 들어갔고, 어느새 그들과 울고 웃고 화도 내고 기뻐도 하고 있었으며, 내 아버지가 평생 반구대를 오르락내리락했듯 나도 이곳을 집 앞 공원인 양 드나들고 있었다. 150보 떨어진 내 부모 집보다 훨씬 더 자주.
그 여자의 이름은 손방수고 그의 남편 이름은 이재걸이다. 이들의 가족 문제를 교차 검증하기 위해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손방수의 셋째 언니다. 형제 사이에서 징검다리 관계는 대체로 좋지만, 이어진 터울은 상대적으로 더 자주 으르릉거린다. 손방수와 셋째 언니 사이에는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질투하는 애증의 감정이 뒤섞여 있다.
손방수 아래로 막내 남동생이 있는데, 그는 반구마을에서 태어났고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지만 이방인처럼 부유하는 인물이다. 누나와 관련된 일에만 마을에 참여한다. 누나가 빠지면 그도 따른다. 젊은 시절 장애인 시설의 세탁 업무를 보다가 오른쪽 팔꿈치 아래가 절단됐다.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해서 한쪽 팔로도 웬만한 사람보다 고단한 일을 훨씬 잘 해낸다.
그는 자기의 짧은 팔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니. 오랫동안 지켜본 바로는 모자람에 대한 자기 내부적 반발로 일부러 끝이 뭉툭한 팔을 걷어붙이고 휘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아무도 그 팔을 신경 쓰지 않을 건데. 그래서 때때로 그 팔보다 그 마음이 더 안쓰럽다. 부러 외면할 때도 있다. 내가 힘들어서.

이재걸은 한량이었지만 갇힌 새처럼 살다가 새장 안에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많지 않은 나이에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가득 안고 세상을 떠버렸다
이재걸은 작년 내 카메라 안에서 사망했다. 손방수의 표현대로라면 한 많은 삶이지만, 카메라를 통해 객관적으로 바라본 그의 삶은 자유분방하던 새가 어느 날 새장에 갇힌 뒤 마음도 시야도 좁아져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병마에 못 이겨 고작 60대 중반의 나이로 왜 죽는지도 모르게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호시절 한량처럼 호탕하게 살다가 반구대로 들어온 이후 이런저런 감정에 이리저리 뒤섞이다가 적층된 갑갑증을 누군가에게 퍼부었다. 만 4년 동안 지켜본 그의 죽음은 한(恨)이 아니라 폐쇄공포에 기인한다. 그러니 그 누군가로 향한 분노는 갇혔고, 또 스스로 가둬버린 데 대한 핑곗거리였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손방수의 분노 도정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손방수의 심성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는 지금 모습에서 유추해 보면 어렸을 때 꽤 예뻤을 것이고, 그래서 부모가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다른 형제들보다 어른들에게 사탕과 용돈을 더 많이 받았다. 관심이 당연하게 된 어린아이가 어른이 됐을 때 미움을 받으면 견디지 못한다. 아마 성장하고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그 괴리에서 고통이 컸을 것이다. 해결 방법을 찾지 않았고, 찾을 방법을 몰랐고. 그래서 지금처럼 말만 많고 이기적이고 미운 사람이 됐을 것이다.
6년간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는 그녀가 얼마나 겁이 많고 여려 터졌고, 그리고 선한 사람인지 안다. 속이 너무 연약해서 제 딴에는 갑옷을 둘렀는데 그게 논우렁이처럼 약해빠져서 툭 치기만 해도 제 살에 생채기를 낸다.
작년 2월 말, 한때 사수였던 유상곤 감독이 세상을 떴을 때 영화판 사람들의 고단함과 허망함을 기록하고 싶어서 하룻밤 사이에 원고지 500매가 넘는 글을 썼다. 무거운 감정이 진정되지 않아 내친김에 손방수를 놓고 또 하룻밤 사이에 그 이상의 글을 썼고, 마무리를 지은 뒤 한참을 울었다. 게으른 인간이 그만큼 집중해서 쓸 말이 많았던 것도 놀라웠지만 새삼 손방수의 삶이 섧고 아팠다.
2020년 12월, 이장 선거에서 이재권이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됐다. 사람들은 납작 엎드려 살던 그가 얼마나 사납고 거친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걸 얼마나 누르며 살고 있는지 몰랐다
2020년 12월, 이장 선거에 이재권이 출마했을 때 집청정 최원석 대표와 경쟁했고, 만장일치에 가까운 득표로 당선됐다. 당시 사람들은 이재권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사실상 추대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주민들은 이재권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점잖고, 많이 배웠고, 그리고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는 사람인 줄 알았던 것 같다. 10년이나 한실마을에 살았는데도 주민들은 그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재권 이장이 냉철하고 영리한 건 맞지만 성질이 고약하고 고집이 세다. 그래서 상왕 노릇 하며 이장을 쥐락펴락하고 싶었던 사람, 밀려 있던 민원을 한꺼번에 해결해 줄 거라 기대했던 사람, 조용히 사는 모습만으로 그를 만만하게 봤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는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왔고,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최전방에서 짱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투견처럼 달려들던 사람이다. 이제 세상에 자기 같은 맹수가 필요 없다고 판단해서 스스로 오지로 찾아 들어와 숨죽인 듯 살고 있었어도 그는 세상사에 발이 넓었고, 그쪽 세계에서 여전히 썩어도 준치였다. 여전히 빨갱이 소리 들으며 ‘노동 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해 게릴라식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어떤 전략가는 그가 이곳에서 이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단걸음에 달려와 예의를 갖췄다.
그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흡사 무협지의 한 장면 같았다. 절대 고수를 찾아온 옛 동지의 한 에피소드랄까, 무사들의 모습이랄까. 노동운동도 모르고 민주화운동도 모르고 그 혜택만 달게 누렸던 내 눈에 그들의 모습은 영화적이었다.
예를 표한 그 사람은 돌아가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이 선배는 인간성 자체가 사람을 아끼는 자라서 자기보다 마을 사람들을 먼저 챙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닫혀 있는 마을에서 그는 온몸에 생채기만 남은 채 이장 자리를 내놨다. 앞장서서 이재권을 밀어 올린 몇몇 사람들이 뒤에 숨어서 그를 끌어내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낀 반구대 전체와 주변 인물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을 가지는 캐릭터가 이재권이다. 순수할지언정 절대 순진하지 않고, 사나우면서도 냉정하며, 측은지심이 강하면서도 현실적이고 이익에 밝다. 이렇게 역동적인 캐릭터는 이야깃거리가 화수분이다.

2020년 당시 마을주민들의 ‘공공의 적’이었던 이영준의 본질은 네 번째 만났을 때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여전히 주민들은 그를 오해하고 있다
손방수와 이재걸의 개인사에 매몰됐을 땐 주위가 보이지 않다가 이재권을 좇다 보니 사람들이 보이고 마을 전체가 객관화되기 시작했다. 그다음에 만난 이가 이영준 전 이장이다. 이재권이 이장에 당선되면서 물러난 이다.
언제나 현재의 대표를 가장 미워한다. 허니문 기간에 잔뜩 기대했다가 보풀 하나가 생길라치면 그의 능력과 인성은 부정적으로 일반화된다. 2년 임기가 세 번 반복되면 권한을 권리로 여기게 되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책이 드러나면서 죽일 놈이 되는 것이다. 이재걸이 10년 또는 12년 동안 이장을 한 뒤로 2년씩 최대 3회 연임으로 규정이 바뀌면서 사람들이 계기를 얻게 된 것이다. 만일 연임에 제한이 없는 채였다면 이 고인 물 같은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이영준을 다시 이장으로 선출했을지도 모른다.
이영준을 처음 맞닥뜨렸던 것은 2020년 12월의 이장 선거 때였다. 촬영해도 되겠냐며 대곡경로당으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을 때 거칠게 나를 몰아냈었다. 물론 다 촬영했고 다 녹음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비밀이다. 결과가 나오자마자 나는 카메라를 경로당 안으로 밀고 들어가 바로 뻗쳤다. 이영준은 더 이상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영준과 이재권을 따라다니며 근접 촬영했다.
두 번째는 2021년 3월 초의 일이다. 반구대암각화로 들어가는 길에 이영준이 통행금지 말뚝을 박았다는 소리를 듣고 급하게 반구대로 올라갔다. 말인즉슨 수십 년간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해줬는데 명승 지정과 유네스코 등재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 산을 적당한 금액에 매입하는 방식으로 보상해 달라는 것이었다.
울산MBC가 취재를 나와 있었다. 그들은 내가 개발과 보상을 주장하는 마을주민 편인 줄 알고 굉장히 거부감을 표했었다. 내가 얄밉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게 거슬렸을 수 있지만, 어쨌든 난 카메라 워크를 최대한 배려했고, 촬영이 모두 끝난 뒤 화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방영 내용에 관해 몇 시간이나 소통했다.
2021년 이석희 선생이 울주문화재단 지원 사업 서류 작성을 부탁해 왔고, 그걸 도와주면서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300만 원짜리 지원을 추가로 받아냈다. 그 지원 사업을 수행하면서 주민들의 사진을 촬영해 액자에 담아 나눠주는 과정에서 이영준을 세 번째로 만났다.

※반구대특집 1편에서 7편까지 ‘오목교’로 표기했던 것을 모두 ‘오곡교’로 바로 잡습니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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