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열리는 다양한 예술 행사에 참가하다 보면 생각보다 행사의 밀도가 높지 않아 놀랄 때가 잦다. 좋게 말하면 소박하고 거칠게 말하면 별것 없을 때가 많다.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돌아오는 날이 부지기수다.
그럴 때면 두 가지 마음이 든다. 하나는 나도 (그리고 내 친구도) 할 수 있겠다는 마음. 다른 하나는 이렇게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고 기회를 주는 환경이어서 훌륭한 작가 혹은 예술가가 탄생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마음.
위대한 예술가는 홀로 탄생하지 않고 어쩌면 이들보다 더 훌륭한 관객이나 독자가 만드는 것 같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보다 나는 더 자주 이곳의 관객에게 감탄한다. 아무리 시시해 보이는 것이라도 일단 누군가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대단히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연주가, 춤이, 낭독이 끝날 때까지 대체로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지루한 시간이 이어져도 끝까지 들으려고 애쓴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이어도, 무대 위의 사람이 만들어내는 세계에 참여하기 어렵더라도 조소하거나 쑥덕거리는 일이 좀체 없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관객의 위대함을 실감한다. 상대를 함부로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예찬할 줄 아는 것. 창조성이 피어나는 자리는 그렇게 만들어지는지 모르겠다.
<즐거운 학문>에 등장하는 니체의 문장을 몇개 인용해본다. “너는 어떤 사람을 악하다고 말하는가? 항상 모욕하려 하는 사람을/ 네게 가장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의 부끄러움을 덜어주는 것/ 자유를 획득했다는 징표는 무엇인가? 더 이상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나는 자주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인 척하지 말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글을 쓰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간편한 말인가?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예술로 만들려면 우선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이 가치롭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어려운 과제다. 여성, 장애인, 성노동자, 유색인종, 빈곤층, 저학력자, 노인… 사회에 떠도는 부정적 소문들은 이들의 몸에 엉겨붙고 천천히 내부로 흡수돼 수치심을 내재화시킨다. 무대에 오르기 위해 너는 더 아름다워야 해, 말라야 해, 대단한 직업을 가져야 해, 똑똑해야 해. 누군가는 전 국민이 보는 방송에서 공공연히 성희롱을 저지르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존재를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수치심을 느낀다. 그래서 이들은 자주 보이지 않는 존재 되기를 자처한다. 반대로, 이들의 가장 강력한 힘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 자체에 있다.
수치심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책을 낼 때, 무대에 오를 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고백할 때,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는다. 보여지면 상처받을 수 있는데 괜찮겠냐고 자꾸 묻는다.
그러나 취약성은 약점이 아니다. 피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인 데이비드 화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시도는 우리가 본래가 아닌 존재가 되려는 헛된 시도입니다. 더 심각하게는, 우리는 취약해지기를 거부하면서 매 순간 필요한 도움을 거부하게 되고,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대화를 마비시키게 됩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어떻게 취약성 안에 머무를 것인가’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용감해지고, 더 자비로워질 수 있을까. 두 개의 선택지가 매일 펼쳐진다. 취약성 안에 머물며 온전하고 힘차게 살아가는 것과, 인색하고 불평하고 두려워하며 삶의 문턱을 온전히 통과하지 않는 것.
취약성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세상과 용기 있는 대화를 지속해 나가기. 그것이 내가 나에게서, 타인에게서 찾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