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캐나다, 미국의 51번째 州 될 것”
캐나다 국왕 겸하는 英 찰스 3세는 침묵만
“우리 주권 대변 못하는 국왕 왜 필요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州)’로 삼겠다고 공공연히 위협하는 가운데 캐나다 국민 사이에 찰스 3세 국왕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국 국왕인 동시에 캐나다 국왕이기도 한 찰스 3세는 트럼프의 노골적 야욕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마침 영국을 방문 중인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찰스 3세를 알현할 것으로 알려져 이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논의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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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현지시간) AP 통신에 따르면 트뤼도는 이날 런던에서 기자들과 만나 “내일(3일) 찰스 3세 국왕을 만나 뵙고 캐나다인들에게 매우 중대한 문제에 관해 의논할 것”이라며 “지금 캐나다인들에게 주권 국가로서의 독립을 옹호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트뤼도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주재로 열린 우크라이나 안보 관련 긴급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런던을 찾았다.
트럼프는 당선인 시절인 지난해 11월 “취임하면 모든 캐나다 상품에 25%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에 깜짝 놀란 트뤼도가 트럼프 사저가 있는 플로리다주(州) 마러라고 리조트로 황급히 달려갔다. 관세 부과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트뤼도를 향해 트럼프는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어떻겠느냐”고 깜짝 제안했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여겨졌으나 그 뒤로도 트럼프는 트뤼도를 ‘총리’가 아닌 ‘주지사’(Governor)라고 부르며 캐나다 영토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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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영국 식민지에서 자치령을 거쳐 독립한 캐나다는 오늘날 영연방 회원국이며 호주, 뉴질랜드 등과 함께 영국 국왕을 자국 국가원수로 섬긴다. 찰스 3세는 영국 국왕인 동시에 캐나다 국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찰스 3세는 캐나다의 독립과 주권을 부정하는 듯한 트럼프의 모욕적 언사에 이제껏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캐나다 정치인과 지식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선 ‘도대체 캐나다 국왕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느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캐나다의 국가원수로서 트럼프를 향해 ‘우리 주권과 독립을 존중하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캐나다 헌법학자 라일 스키너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에서 “캐나다 국왕이 트뤼도 총리를 접견한다고 하니 이후 캐나다 국토와 주권에 관한 국왕 명의의 성명이 나오길 고대한다”고 밝혔다. 스키너 등은 만약 국왕이 공개 성명을 내놓지 않으면 많은 캐나다인들이 실망할 것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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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국 정부가 찰스 3세 그리고 캐나다 정부를 간곡히 만류하고 있는 점이 변수다. 영국은 최근 스타머와 트럼프의 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찰스 3세 명의로 된 국빈 방문 초청장을 트럼프에게 건넸다. 평소 영국 왕실에 경외감을 표시해 온 트럼프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영국 입장에선 캐나다 문제로 찰스 3세와 트럼프가 정면으로 맞서는 듯한 모양새가 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울 법도 하다. 무엇보다 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과 캐나다에서 국왕의 정치적 발언은 엄격히 제한된다.
캐나다는 영연방 회원국 가운데 영국 국왕을 자국 국가원수로 섬기는 나라들 중에서도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가장 높다. 2022년 찰스 3세의 모친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타계 이후 호주, 뉴질랜드 등에선 ‘헌법 개정을 통해 공화국으로 전환하자’는 여론이 확산했으나 캐나다만은 예외였다. 여기에는 재임 기간 무려 22번이나 캐나다를 방문할 만큼 캐나다에 공을 들인 엘리자베스 2세의 역할이 컸다.
일각에선 이번에 찰스 3세가 트럼프에 맞서 캐나다의 주권과 국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면 ‘대체 캐나다 국왕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대중 사이에 급속히 퍼져 나갈 것이란 우려를 제기한다. 정작 캐나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아무 보탬도 되지 않는 영국 국왕을 섬기느니 차라리 헌법을 고쳐 캐나다도 공화국이 되는 편이 낫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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