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교장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었다. 챗GPT를 필두로 다양한 AI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는 요즘, 실시간으로 묻고 답하는 게 더 이상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곧잘 번역도 하고, 길고 복잡한 문서를 재빠르게 한 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한다. 생성형 AI가 창작자들을 도울지 위협할지 기대와 걱정이 섞인 물음도 들려온다. 고심 끝에 강연의 제목을 ‘AI는 시를 욕망하지 않는다’로 잡았다. AI에 ‘묻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물을 때처럼, AI에 던지는 질문이 정교할수록 답도 뾰족해진다.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은 답하는 능력이 아니라 질문하는 능력일지 모른다. 제대로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더 구체적인 답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답변을 보고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추가로 다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AI가 그것을 먼저 제안하기도 한다. 웹상의 방대한 정보와 그것을 빠르게 처리하는 능력이 결합해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머신러닝과 딥러닝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AI 시대에 사라지고 나타날 직업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달에 시집 <유에서 유>가 영문으로 번역됐다. 동음이의어의 잦은 사용, 언어유희를 통한 상황 전개, 같은 단어라도 행마다 다른 의미를 갖게 하는 전략을 고려하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이 걱정은 시집의 초입에 있는 안수현 번역가의 말을 읽고 금세 사라졌다. “오은의 시는 일상적 언어의 사용을 넘어선 한국어 감각을 체험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언어적 차이로 인해, 이 감각을 되살리는 데 번역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다.” 나는 더 나은 번역이, 나아가 더 좋은 창작이 이 ‘겸허함’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다. 겸허함은 사람을 신중하게 하고 ‘차이’를 어떻게 좁힐지 궁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때마침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번역대학원대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문학에의 관심이 부쩍 늘어난 요즘, 이해와 공감으로 차이를 메우고 이를 창의적으로 전달하는 번역가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번역가의 손때가 묻은 번역, 최적의 단어를 고르고 뉘앙스를 고려하는 번역, 낱낱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는 번역이 양질의 번역일 것이다. 번역 덕분에 우리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회를 경험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뒤에는 데버라 스미스가, 김혜순의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 뒤에는 최돈미가 있었다.
번역대학원대학교 설립과 관련해 정책토론회도 열린다고 한다. 제목은 ‘문학번역의 미래-AI시대 인간번역의 가치’다. 기계번역의 효용성이 아니라 인간번역의 가치를 논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번역이 단순히 ‘문장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책 한 권에 담긴) ‘삶을 통째로 옮기는 일’임을 상기해야 한다. AI는 잘하고 싶은 마음, 여기의 맥락을 거기의 상황에 걸맞게 옮기려는 의지, 잠재된 의미를 발생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넘어야 할 언덕이 여럿 남았겠으나 첫발을 뗐으니 속도를 내주었으면 한다. 빼어난 한국문학 작품들이 더 많이 외국에 소개되면 좋겠다.
번역가 홍한별은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위고, 2025)에 이렇게 썼다. “실제로 번역을 할 때는 ‘단어’를 번역(직역)하거나 ‘단어의 의미’를 번역(의역)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제3의 무언가가 있다.”
제3의 무언가는 인간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는 “행간을, 침묵을, 여백을 번역”하는 지난한 일일지 모른다. 동시에 이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영역이기도 하다. 사람이라서 불완전하고, 인간이라서 공감한다. 제3의 무언가 덕분에 우리는 차이를 이해의 자리로 옮길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