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미디어] 저승 재판을 응원합니다

2024-07-04

올해만 두 번의 장례를 치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장례를 마무리하며 느낀 것은 좋은 사람이 떠나면 좋은 사람들이 함께 슬퍼한다는 것이다. 하루 상이 끝난 후 장례식장 한쪽에 마련된 좁은 대기 장소에 몸을 구기며 누운 나와 동생은 늘 같은 대화를 했다. “내 장례식장엔 열 명은 올까?”라는 말에 동생은 다섯 명 정도 올 것 같다 답했다. 그렇다. 장례식장에 ‘참석’해줄 이는 있어도 ‘참여’해줄 이는 아주 소수일 것이다. 고요한 장례식장은 가족의 슬픔으로 힘겹게 채워진다. 하지만 많은 이가 참여한다면 그 슬픔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먼 미래 남겨질 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우리의 하루는 ‘이제 잘 살아야겠다’로 마무리 지었다.

첫 장례식에는 그야말로 고장 난 로봇처럼 움직였다. 어떻게 인사를 건네고, 절을 하고, 술잔은 따르고 돌리며, 향을 피우는 방법까지. 그렇게 속성으로 배운 장례 절차의 부작용으로 첫 문상객의 방문 땐 그보다 반 박자 느리게 움직이기도 했다. 30대인 지금 이렇게 장례가 어색한데 50대가 되면 저절로 장례식장에 자연스러워질까? 라고, 생각하던 첫 장례와 달리 한 달 만에 겪게 된 두 번째 장례에선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슬퍼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자리를 정리하며 처음 보는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랬다. 장례식도 죽음도 겪으면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슬픔에 익숙해질 때쯤 불교 신자인 우리 집안은 절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렇게 떠난 이들과 함께 인생 첫 저승 재판 레이스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화 <신과 함께>로 익숙한 단어이자 불교 용어인 49재는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제공하는 법회와 설법(2003.11월호)에 그 의미를 이렇게 표현한다.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 좋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도록 49일간 개최되는 천도의식’. 떠난 이는 살아생전 쌓은 덕과 악한 행동을 일곱 지옥을 지나가며 재판을 받고 이승에 있는 이들은 기도와 공양으로 재판을 응원한다. 일곱 지옥은 타인을 도왔는지, 도둑질했는지, 부모에게 효도했는지,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었는지, 위험에 처한 이들을 외면했는지, 험담했는지, 강력범죄 여부에 대해 심판을 한다. 자칫 엄격하지 않은 재판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스스로 물었을 때 선뜻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내가 누굴 도왔던 적이 있는가?’ ‘효도했는가?’ ‘불의를 외면한 적이 있지 않을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이 질문들에 재판이 불리해진다면? 저승에서는 덕을 쌓을 수 없기에 이승에서 보내주는 응원 점수가 절로 간절해질 것이다. 그것이 49재를 지내는 이승에 남은 이들의 본분이다.

절을 하고, 경전을 외우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불교는 매뉴얼이 없다. 어떤 자세로 몇 번 절을 해야 하는지, 어느 타이밍에 누가 먼저 절을 할 것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떠난 이를 응원하면 되는 것이다. 마치 야구 경기중 응원가를 목청껏 부르던, 읊조리며 부르던 소리가 작다 해서 그 팀을 응원하지 않는 게 아니듯 말이다. 주지 스님 역시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경건하면서도 편안한 상황에서 재(齎)는 진행된다.

시간이 흘러 49일 여정의 마지막 날, 마지막 인사와 응원을 건네기 위해 50여 명의 인원이 절에 모였다. 여느 때와 똑같이 불경을 읽고, 기도를 한 다음 떠난 이의 극락왕생(極樂往生: 죽은 후 극락정토에서 다시 태어남. 더없이 안락하고 아무 걱정이 없는 곳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을 기리는 바라춤, 살풀이춤, 극락무 등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함께 외우는 불경은 떠난 이를 위한 것뿐 아니라 내가 지은 죄를 용서받고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를 배우는 구절도 포함된다. 49일의 여정은 응원과 동시에 나를 구제하고 있었다.

무교인 이들은 49일간의 여정을 번거롭고 부질없는 절차라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 필자도 처음엔 이 과정들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픔으로 떠난 이들을 떠올리며 소중한 이가 옮겨간 곳이 좋은 곳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저 그 마음만큼은 모두가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

긴 여정 동안 주지 스님은 현재를 극락(천국)과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좋은 일을 하며 사는 나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고 강조하셨다. 죽음과 장례, 49재까지 이 모든 과정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결국, ‘나’를 위해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응원한다. 어떤 좋은 이의 저승 재판의 결과가 승소이길. 나아가 모든 이들의 재판이 선업(善業)으로 승소하길.

조은진 청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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