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선거철만 되면 곧잘 무국적자가 되고 만다. 선거에 나서는 후보는 국민이 원해서 출마한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그의 출마를 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법원에 의해 무국적자로 내몰렸다.
야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에 대한 판결을 내리면서 대법관들은 “일반 국민의 시각”을 강조하며 고등법원의 무죄 판결을 뒤집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국민으로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법 정신과 법리에 입각한 엄밀한 판결이었기에 나는 또다시 일반 국민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근거로 일반과 비(非)일반을 나누는 것이며, 또 일반 국민의 생각은 통일되어 있다고 믿는 것일까?
국민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인간은 프로그램대로만 생각하는 로봇이 아니다. 국민 모두가 똑같이 생각하지 않음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다만 사람이 인간답게 살려면 사회를 이뤄야 한다. 생각이 다른 수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자는 목표를 공유하며 모여 사는 것이 바로 사회다. 그러니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살 수 없음은 자명하다. 만일 상이한 생각으로 갈등이 발생하고 충돌이 일어나면 누군가가 이를 조정하고 중재해야 한다.
이럴 때 핵심 역할을 하는 이들이 전문가 집단이다. 그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갖추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수련 과정을 거친 이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며 그들의 조정과 중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또한 그렇게 형성된 전문성이기에 거기에는 도덕성이 깃든다고 여긴다. 그들이 행하는 조정과 중재가 단지 전문적 지식뿐 아니라,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 다수가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적 판단에도 기초한다고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의 대법원 판결은 일반 국민의 시각을 운운하며 이러한 자신들의 전문성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의 전문성이 회의되는 결과가 야기됐고, 그들의 도덕성도 아울러 의심받는 사태가 초래됐다. 물론 그들은 이렇게 얘기하는 나 같은 국민을 일반 국민이 아니라고 치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여 대법관들의 전문성이 증발되고 도덕성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