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9년 제주에서 ‘명품 니트’ 한림수직 탄생
아일랜드 수녀들에게 직접 뜨개질 기술 배워
당시 월급쟁이 봉급의 70% 가격에도 큰 인기
콘텐츠 전문가 고선영씨, 2021년 복원 시작
옛 방식 그대로 주문제작…최근 팝업 전시도
‘지역다운 가치’ 담긴 지속 가능 브랜드로 주목
김지연씨의 아이보리색 니트 카디건은 당장 엊그제 샀다고 해도 믿길 정도로 짜임새가 탄탄하고 무늬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30여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강추위에 대비해 어머니와 이모들이 일곱 벌을 구입해 나눠 입은 카디건은 이후 딸 지연씨에게 대물림됐고 지금껏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저에게는 꽤 큰 데도 따뜻해서 잘 입고 다녔어요. 어쩐지 할머니의 유품처럼 여겨져서 버릴 생각은 할 수도 없었고요.”
지난 8일부터 서울 계동에서 열린 ‘한림수직, 기억의 흔적’ 팝업 전시에서 만난 이 오래된 카디건은 진정한 명품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연씨의 카디건은 1959년 제주에서 탄생한 전설의 명품 니트 브랜드 한림수직 제품이다.
“한림수직은 니트의 종주국 아일랜드에서 부임한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님이 66년 전 만든 브랜드예요. 제주 여성과 청년들이 이 척박한 섬을 떠나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만들고자 당시 면양 35마리로 시작했죠.”

이번 팝업 전시를 기획한 제주 기반 콘텐츠그룹 재주상회의 고선영 대표에 따르면 당시 세 명의 아일랜드 수녀까지 건너와 제주 여성들에게 니트 기술을 전수했다. 성실하고 손기술 좋은 제주 여성들은 금세 뜨개질을 익혔고 한림수직은 오래지 않아 고급 니트 브랜드로 명성을 얻었다. 전성기 때는 양이 9000여마리까지 늘었다. 양털을 밀고 한라산 계곡물에 빨아 물레를 돌려가며 일일이 실을 잣고 뜨개질하는 수작업을 거쳐야 하는 탓에 당시 월급쟁이들의 봉급 70%에 달하는 고가였음에도 인기를 끌었다. 제주 여성들 사이에서는 한림수직 니트를 사기 위한 계가 있었을 정도다. 한 미국인의 제보로 타임지에도 소개되어 제주 시내 호텔뿐 아니라 서울 조선호텔 아케이드에서 판매되기도 했다.
무려 1300여명의 제주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지역을 살리는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지만, 외국산 원사와 화학섬유의 저가 공세와 속도전에는 버틸 도리가 없었다. 한림수직은 2005년 문을 닫았다.
“일본에서 빈티지 사업하는 분으로부터 현지 빈티지 마니아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한 한국 제품이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는데, 그게 한림수직이었어요. 워낙 질이 좋아서 이미 국내 중고 시장에서도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어요.”

2021년 고 대표는 ‘한림수직을 아시나요’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특집 기사를 제주 로컬 매거진 ‘인(iiin)’에 게재하고 전국의 한림수직 제품 소장자들의 협조를 받아 전시를 열었다. 당시 제주 MBC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소장자들은 니트를 물려준 어머니의 기억으로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한림수직 스토리는 “쉽게 옷을 사고 입고 버리는 문화가 만연해진” 사회에 신선한 자극이 됐다. 이는 ‘브랜드 재생’의 기폭제가 됐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줄 알았던 한림수직은 고 대표와 이시돌농촌개발(성이시돌목장)을 통해 부활했다. 성이시돌목장에서 버려지던 양모와 재생 양모를 섞은 울 100% 실로 한림수직 니트류를 일부 복원해 2021년 크라우드펀딩에 나섰다. 며칠 만에 1억원어치가 팔렸다. 한림수직을 기억하는 세대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생산한 양털의 가치, 무엇보다 브랜드에 담긴 스토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힘을 모아줬다. 재탄생한 한림수직은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채취한 단일 소재 국내산 울 100% 사용, 재고를 남기지 않는 적정 생산, 핸드메이드 등 친환경 제작 방식을 고수하며 지속 가능한 의류 브랜드를 지향한다.
“브랜드의 명맥을 잇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3년 전부터 한림수직 니트스쿨을 운영하고 있어요. 과거 한림수직에서 일했던 장인께서 직접 교육해 10명의 수제자가 배출됐고, 현재 수편 라인을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손뜨개로 만드는 수편 라인 제품은 기편 제품보다 고가지만, 2027년 생산분 주문까지 마감됐을 정도로 인기다. 기편 제품은 카디건 기준 30만원대, 장인이 100% 수작업으로 만드는 주문 제작 카디건은 80만~100만원대에 판매하지만, 워낙 원재료의 가격이 높다. 또한 옛 제작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에 생산량도 적다. 아일랜드의 아란섬에서 전해진 아란 니트는 먼 이국땅으로 넘어와 제주 무늬로 거듭났고 한림수직의 시그니처가 됐다. 수편 니트 의뢰인은 제주에 와서 직접 치수를 재고, 제주 무늬 샘플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니트를 주문할 수 있다. 완성까지는 보통 2~3주가 걸린다. 내 옷이 얼마나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제작 공정 체크도 가능하다.
“원래 이 니트는 어부의 옷이었어요. 방풍·방습 기능이 뛰어난 양모 스웨터를 작업복으로 입으면서 이 무늬가 유명해졌어요. 가문의 문장처럼 마을이나 가문마다 니트의 무늬가 달라서 어부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어느 마을 사람인지 알아보게 하는 인식표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해요.”

아란 무늬에도 각각의 의미가 있다. 꽈배기는 배에서 쓰는 밧줄을, 벌집 모양은 꿀벌의 성실함을 상징한다. 고 대표는 이 니트 한 벌을 통해 알리고 싶은 것이 많다. 그는 한림수직의 니트 재현에 머물지 않고 거의 사라진 당시의 담요나 코트 원단 등의 직조 기술을 되살리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다. 가방이나 장갑, DIY 키트 등 제품군도 넓히고 있다. 단순히 복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 한림수직’이 가졌던 지역 브랜드로서의 가치를 되살리기 위해서다. 패션 전문가가 아닌 콘텐츠 전문가가 이 프로젝트에 뛰어든 이유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지역 브랜드가 많이 사라졌어요. ‘지역다운 지역’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한림수직처럼 지역의 가치를 담고 있는 브랜드가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
한림수직은 서울에 이어 21일부터 12월9일까지 디앤디파트먼트 제주에서 팝업 전시를 이어간다. 12월 말엔 ‘쓰타야 서점’으로 잘 알려진 일본 도쿄의 복합문화공간 다이칸야마 쓰타야 티사이트(T-SITE)에서 전시 및 판매, 뜨개 워크숍을 진행할 예정이다. 고 대표는 지난 5년은 한림수직의 제품을 복각하는 “재생의 시간”이었다면, 앞으로는 “지역다움, 제주다움”을 계속 이어가는 제주의 내일을 만들어갈 것이라는 계획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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