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11월 9일은 ‘도산 안창호의 날’이다. 캘리포니아 주 의회가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을 기리기 위해, 생일인 11월 9일을 가주 기념일로 선포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날을 무심하게 그냥 지나치곤 한다. 그런 날이 있는지도 모르는 이도 적지 않다.
민족 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자 도산 선생은 우리 민족과 미주 한인 사회의 큰 정신적 스승이시다. 선생께서는 가주에서 민족 지도자로 활동하며, 대한인국민회 창립 등 한인 사회 기틀을 다지셨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 좋은 어른, 좋은 남편, 좋은 부모로서의 도산이 솔선수범 보여준 인간적 면모를 새롭게 인식하고 배우는 일이다. 방향을 잃고 허둥대는 오늘의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겨, 삶의 바른 길잡이로 삼아야 할 덕목이다.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산은 좋은 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도산이 지은 창가(唱歌) 작품은 거국가, 점진가, 흥사단 입단가, 격검가 등 25편이 전해지는데, 이 창가들은 선구적 면모를 갖추고 있어서, 우리 시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문학사적 의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평가다.
문학평론가 이형권 교수는 시인 도산을 이렇게 평가한다. “도산의 창가는 그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애국 계몽기 혹은 근대계몽기였던 당시의 시대적 흐름과도 밀접히 관련을 맺는다. 그의 창가 작품은 당대의 문단 상황에 견주어볼 때 상당한 수준을 확보한 것이었다. 그는 명민한 시적 감수성을 가지고 역사의식 혹은 시대 감각을 노래한 선구적 시인이었다.”
이처럼 도산은 구한말의 신지식인으로서의 지적인 능력과 시대 감각, 출중한 연설 능력에 더해 시인으로서의 창작 능력도 갖춘 인물이었다. 또한, ‘애국가’ 가사도 도산의 작품이라는 설이 아직도 유효하다. ‘애국가’의 원작자이든 아니든 도산은 ‘애국가’가 오늘날의 가사로 정착되는 데에는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도산은 창가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많은 작품을 창작했고, 독립협회와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애국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매개로 창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창가가 지니는 강한 호소력과 동화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노랫말도 뛰어나지만, 더 소중하고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인간 도산의 삶 밑바닥에 진하게 깔려있는 시정신이다. 그 시정신의 바탕은 사랑의 마음이다. 도산의 편지 몇 구절만 읽어보면 바로 실감할 수 있다. 부인과 아들,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절절한 사랑과 시심(詩心)이 가득하다. 그가 얼마나 정이 많고 자상한 사람인지 느껴져 옷깃을 여미게 된다.
눈물 나는 구절도 많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나라 위한 일을 하느라 가족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하는 구절, “식구들의 사진이라도 보내어 주시오”라는 부탁, “내년 봄이나 여름에는 집에 다니어 오려고 하는데 그때에 힘없는 남편이라고 괄시나 하지 마소서”라는 당부의 말, 맏아들에게는 아비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딸들에게는 화초에 물 잘 주라고 이르는 자상함 등등, 참으로 애틋한 시인의 마음이다.
도산 사상의 바탕은 사랑이다. 넓게 보면 도산의 치열한 독립운동의 바탕을 이루는 것도 겨레 사랑, 사람 사랑으로 뭉쳐진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혜련, (…) 사랑 이것이 인생의 밟아나갈 최고 진리입니다. 인생의 모든 행복은 인류 간의 화평에서 나오고 화평은 사랑에서 나는 때문입니다.” -도산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더 상세하게 알고 싶은 분은 문학평론가 이형권 교수(충남대)의 논문 ‘도산 안창호 창가의 문학사적 의미’를 참조하기 바란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