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만 폐암 원인’ 입증 주력···건보의 절치부심, ‘담배소송’ 뒤집힐까

2025-05-21

폐암 4기 환자 장모씨(67)는 2019년 첫 진단을 받은 뒤 지금까지 6년 넘게 투병중이다. 한 차례의 입원치료와 10회가 넘는 항암주사 치료를 받았고 통원치료는 매주 이어지고 있어 육체와 정신 모두 고통스럽다. 그는 17세 때부터 40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담배를 매일 1~2갑씩 피웠던 이력이 있다. 폐암 진단을 받기 전부터 건강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진 것을 체감해 금연에 도전했지만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장씨는 “4~5차례 금연 시도를 했지만 담배의 중독성 때문에 금연 성공이 너무나 어려웠다”며 “주변 친구 7명 중 금연에 성공한 건 나를 포함해 2명뿐이고 나머지는 아직도 피우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개인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흡연과 금연이 의지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는 강변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담배 소송’ 항소심의 마지막 변론이 서울고법 민사6-1부에서 22일 진행된다. 2014년 건보공단이 KT&G와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 등 국내 담배시장 점유율 상위 3사 및 제조사 1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지 11년만이다. 건보공단은 폐암 중 편평세포암·소세포암, 후두암 중 편평세포암을 진단받은 환자 가운데 담배를 20갑년(1갑년은 1년간 하루 1갑씩 흡연했을 때를 기준으로 한 담배 소비량) 이상, 30년 이상의 기간 동안 피운 3465명에 대해 지급한 2003~2012년 간의 건강보험 급여 약 533억원을 담배회사들이 배상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2020년 1심 판결에서는 원고인 건보공단이 패소했으나 2심에서는 과거의 판례와 다른 결론이 나올지 관심이 집중된다.

소송에서 양측이 다투는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는 흡연이 폐암 발병의 원인이 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언뜻 봐서는 흡연이 폐암을 일으키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으므로 법적으로 다툴 여지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과거 국내 법원의 판례에서는 흡연이 폐암을 유발하는 ‘역학적 인과관계’는 인정하더라도 소송 당사자에 적용할 ‘개별적 인과관계’까지 모두 인정하진 않았다. 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진료 데이터를 통해 흡연이라는 행위가 폐암 위험을 높인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더라도, 소송을 제기한 개인이 폐암에 걸린 이유가 다른 이유는 전혀 없이 전적으로 흡연 때문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의료계에서는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했다면 개인에게도 똑같은 인과관계를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폐암 발병에 관여하는 유전적 요인을 비롯해 환경적 요인 중에서도 석면·방사능 등 기타 원인이 있지만 흡연이 폐암 발병 위험을 높인다는 결론은 여러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재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흡연은 폐암 발병 원인 중 85%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원인이고, 흡연으로 폐암 위험이 30~40배 증가한다는 국내·외 자료가 무수히 많다”면서 “극히 드물게 가족력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여건 때문에 폐암이 발생할 위험은 배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건보공단에 앞서 국내 개인들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은 흡연과 폐암 간의 일부 인과관계를 인정하기도 했다. 흡연 때문에 폐암에 걸렸다며 국가인 대한민국과 KT&G를 상대로 제기된 2건의 소송에선 2014년 4월10일 대법원의 최종 선고가 나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원고가 패소했으나 1·2심에서도 역학적 인과관계를 비롯해 일부 개인적 인과관계도 인정한 판단이 나온 바 있다. 권규보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한국 법원에서도 역학적 인과관계에 대해서 인정을 했지만 개별적 인과관계를 부정했는데, 일부 고등법원에서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한 경우도 있다”며 “상고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개별적 인과관계를 부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앞선 판결에서 흡연과 폐암 사이의 인과관계가 일부 인정됐다고 해서 이번 건보공단 소송에선 담배회사의 책임을 묻는 전향적 결론이 내려질 것이라 쉽게 예측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하며 상고를 기각한 대법원 판례가 있기 때문에 이를 뒤집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다. 또 다른 주요 쟁점인 ‘담배회사의 제조물·불법행위 책임’에 대해 법원은 담배회사가 담배를 제조·유통하는 과정에서 유해성은 은폐하거나 불법행위를 했다고 보지 않았다.

이 쟁점은 담배가 폐암 등의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유해한 제품임에도 담배회사가 이를 의도적으로 숨겼거나, 담배 제조 과정에서 의존성을 높이기 위해 인체에 유해한 첨가제를 더하거나 니코틴 성분을 조작하는 등의 조치를 했는지와 관련된다. 현재로서는 담배회사들이 구체적 제조 공정에 관해 밝히지 않으면서 영업비밀로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소송을 통해 담배회사의 책임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건보공단도 이런 현실을 감안해 항소심에서는 특히 개별적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임현정 국민건강보험공단 법무지원실 실장은 “이번 소송에선 가족력·직업력이 폐암 발병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로지 흡연만이 원인이 됐음을 입증하라는 재판부의 요구에 맞춰 지적된 기타 위험요인은 확인되지 않은 1467명의 의무기록 등 관련 자료를 전면 제출했다”면서 “그간 담배 소송에서 공단이 패소한 것은 2014년 대법원 판결과 사법시스템의 한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인데, 이 소송에선 방대한 증거와 전문가 의견을 확보해 과거와는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담배회사들은 소송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KT&G 관계자는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별도의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고만 답했다. 담배회사들은 과거 소송을 전후해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영업활동을 해왔으며 흡연으로 건강상의 피해를 입은 것은 개인의 책임도 일부 존재한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다만 의료계에서는 이런 인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지적이 나온다. 흡연은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 보기 어려우며 중독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룡 고려대 구로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담배는 일반적인 기호식품과 달리 중단하면 불안해 하고 성격이 바뀌며 잠을 잘 못 이루는 등의 금단증상이 나타나므로 중독성이 있는 유해물질이라 자유의지를 이유로 개인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며 “진료실에서 만나는 폐암 환자 10명 중 7~8명은 공통적으로 과거 군 입대 후 보급품으로 나온 담배 때문에 흡연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만큼 흡연을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담배회사의 책임을 지적하는 성명은 의료계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금연학회는 “흡연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건강·경제·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의 문제”라며 “중독을 유발하는 담배를 판매한 기업에 면죄부를 줄 경우, 국민의 금연 노력과 정부의 금연사업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밝혔다. 무상의료운동본부를 비롯한 보건의료시민단체들도 공동 성명서를 통해 “담배회사는 첨가제를 통해 담배의 중독성과 위해성을 강화하고도, 흡연을 개인의 자유의지로 몰아가는 기만적 행위를 해왔다”며 “사법부는 담배회사에 면죄부를 주지 말고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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