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비 내리는 칠흑 같은 밤, 해발 1400m 산 정상에서의 얘기다. 혹시나 불빛이 새어 나올까 암막 커튼을 친 ‘회의실’에 일군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2년 전 칠순을 넘겼다지만 도무지 70대로 보이지 않는 탄탄한 몸매의 남자가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는다. 누구나 다 아는 국내 최고의 로봇공학자이지만, 자신의 취미이면서 일의 일부가 된 천체관측과 사진의 세계를 말했다. 회사 건물 옥상에 마련한 천문대에서 찍은 태양계와 그 너머 먼 우주의 사진들. 지난 20년간 터키·호주·멕시코·미국 등 세계 곳곳에 다니며 찍은 화려한 일식 사진과 동영상들…. 이 남자의 이름은 오준호. 휴머노이드 휴보의 아빠로 알려진 인물 맞다. 그는 KAIST 석좌교수이면서, 로봇기업 레인보우로보틱스의 창업자다.
과학자 앞에서 영화 이야기
오 교수에 이어 나온 50대의 남자는 영화에서 많이 본 인물이다.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소개한 그는 요즘 만들고 있다는 영화 얘기를 했다. 지구에서 105억 광년 떨어진 외계 행성의 소녀를 만난다는 내용의 SF 장편영화 ‘미트 세이비카’(Meet Saybika) 제작 스토리다. 지난 5월 원로배우 박정자씨가 지인들을 초대해 미리 치러 화제가 된 ‘1박 2일 장례식’이 실은 자신이 기획해서 제작 중인 영화의 일환이라고 밝혔다. 배우 겸 감독이라는 이 남자의 이름은 유준상. 그는 뮤지컬로 시작해 영화배우를 거쳐 감독이 된 자신의 인생을 풀어놨다.
감독이 된 배우와 별을 보는 로봇공학자가 왜 비 오는 6월의 밤 해발 1400m 산, 캄캄한 정상에서 만나 삶의 보따리를 풀었을까. 이들이 모인 곳은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 연화봉 정상에 있는 소백산천문대. 지난 6월 12일부터 2박 3일간 ‘과학과 문화예술 소통워크숍’이란 이름의 행사가 진행된 곳이다. 천문대엔 오 교수와 유 감독 외에도 생물학자·기업인·작가·촬영감독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23명이 함께 했다.

첫날인 12일 저녁에는 소백산에서 남쪽으로 144㎞ 떨어진 경북 영천의 보현산천문대에서 30년을 지내온 전영범 전 보현산천문대장의 천체사진 이야기, 황나래 천문연구원 박사의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인공위성과 이 때문에 생기는 관측 천문학의 위기 강연, 양유진 천문연구원 박사의 적외선 우주망원경 스피어엑스 이야기, 정우현 덕성여대 교수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작은 우주 이야기 등의 아카데믹한 강연이 이어졌다. 이외에도 2박 3일간 이어진 워크숍에선 우주과학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감독, SF 동화를 쓰는 작가, ‘DBR 스페이스 챌린지’란 이름의 달 기지 연구 아이디어 공모전을 진행 중인 중견기업의 이야기 등 우주와 과학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주제가 ‘소통’인 만큼 이틀 내내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의 열기도 뜨거웠다.
소백산천문대 소통워크숍은 올해로 14년째 열리는 범(凡) 학문·직업 간 소통의 장이다. 과학자와 다양한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만나 과학과 예술·문학·언론·사회 등 경계를 넘어 교류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게 하자는 게 목적이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와 한국천문연구원 주최하고 있다. 2012년 5월 1회를 시작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이 휩쓸던 2020~2021년을 제외하고 매년 두 차례씩 총 21회나 열렸다.

공상과학(SF) 전문가인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는 지금껏 19차례나 참석한 소백산 워크숍의 터줏대감이다. 베스트셀러 『떨림과 울림』의 저자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도 17차례나 참석한 단골 인사다.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를 목적으로 하는 국제단체 SETI와 같이 활동해 온 이명현 갈다 책방 대표도 15차례 소백산 워크숍을 찾았다.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도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자 신분으로 네 차례 참석했다. 이외에도 소설가 은희경, 프로 바둑기사 조혜연 9단, 팝아티스트 마리 킴, 과학 유투버 ‘안될과학’의 궤도(김재혁)와 이효종(과학쿠키), SF영화 승리호의 시나리오 작가 유강서애·윤승민 등 다양한 분야의 유명인사와 전문가들이 다녀갔다. 소백산의 ‘소통 경험’은 웹소설로 나오기도 했다. SF 작가 김창규가 2015년 공개한 『소백산 천문대 연쇄살인사건』이다. 소설 속에는 실제 워크숍에 참여했던 천문대장·작가·평론가·천문학자들의 이름과 소백산 워크숍 행사 중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가상의 얘기가 추리소설처럼 버무려져 있다.
소백산천문대 소통워크숍은 문과 이과가 서로 ‘공돌이’, ‘문돌이’로 비하하며 담쌓고 살아온 우리 근현대 문화의 탈출구 같은 곳이다. 의도했든 아니든 17~19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유럽에 퍼졌던 ‘살롱’ 문화와 닮아있다. 상류층 귀족 부인이 주최한 사교모임이 시작이지만, 살롱은 당시 서유럽의 문학·예술·철학·정치뿐 아니라 과학계와 교류하면서 다양한 주제에 대한 토론과 소통이 이뤄지던 공간이었다. 살롱 문화 속에 근대 서양 문명은 융합하면서 발전을 이뤄간 셈이다.

살롱·카페서 교류한 유럽 지식인들
18~19세기, 유럽 미술계는 살롱과 카페를 통해 예술과 과학이 만나는 전환점을 맞았다. 세잔·모네·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서, ‘빛’ 그 자체를 화폭에 담으려는 실험에 나섰다. 그들의 작품은 살롱과 비공식 지식 모임에서 광학·색채이론, 시각 심리학에 대해 과학자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태어났다.
이 같은 살롱 문화는 20세기 초까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역시 과학과 예술이 교차하던 살롱의 중심에 있었다. 그의 대표작 ‘키스’에 등장하는 화려한 금빛 문양과 꽃 같은 장식은 정자·난자·수정란·적혈구 등 인체 내부 구조를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클림트는 당시 빈 사교·문화계의 중심이었던 베르타 주커칸들의 살롱을 찾으며 해부학자·철학자·생리학자들과 교류했다.
『클림트를 해부하다』의 저자인 유임주 고려대 의대 교수는 ”해부학자의 관점에서 클림트의 그림은 단순히 두 연인의 에로티시즘만을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다“라며 ”1900년대 전후의 과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피부 밑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낸 의과학적 예술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소백산천문대 소통워크숍을 이끌고 있는 손승우 한양대 응용물리학과 교수(APCTP 과학문화위원장)는 ”소통워크숍의 발단은 2009년 유엔이 정한 세계 천문의 해에 맞춰 한국천문연구원 등이 마련한 작가 창작 워크숍“이라며 ”과학자는 예술가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예술가는 과학자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한 네크워킹의 장소가 모임의 취지“라고 말했다.
소백산=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