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을 바라보는 시선

2025-04-02

중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는 루쉰이고 그의 대표작은 중편소설 ‘아Q정전’입니다. 1920년대 초에 발표되었으니 이제 100년이 지났군요. 루쉰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라는 범위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작가입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루쉰을 가리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아시아 작가”라고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아Q정전’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처음 소개된 때는 1930년이었고, 그 뒤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읽혀 왔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크게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중국 사회 비판한 루쉰 대표작

나와 아Q 다르지 않다고 봐야

독서 통한 자기 반성 여지 생겨

최근 중국의 루쉰 비난 걱정돼

① 중국의 국민성을 부정적으로 그렸다고 보는 해석. 이 해석은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하며 정신승리법이라는 자기기만에 함몰되어 있는 아Q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② 1911년 신해혁명 때의 사회상을 부정적으로 그렸다고 보는 해석. 이 해석은 기존의 사회구조를 바꾸지 못하고 실패해버린 신해혁명의 과정에서 아Q가 억울하게 희생되는 모습에 주목합니다.

③ 농민계급의 혁명성을 긍정적으로 그렸다고 보는 해석. 이 해석은 처음에는 혁명이란 건 나쁜 거라고 생각하던 아Q가 나중에 혁명이 좋은 거라고 느끼게 되는 장면에 주목합니다.

저는 이 세 가지 해석 중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셋 다 일리가 있습니다. 이 셋은 공존이 가능합니다. 정신승리법에 함몰되어 있던 아Q는 정신승리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에 거듭 부딪히면서 차츰 고뇌가 커지고, 그러다가 마을의 나으리들이 혁명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혁명이란 게 좋은 거라고 느끼게 되며, 그러다가 강도 혐의를 뒤집어쓰고서 사형에 처해집니다. 이 중에서 어디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셋을 다 포괄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아Q는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입니다.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여 각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으며 실제로 부분적이고 모호한 상태로나마 각성을 몇 차례 하기도 하지만, 끝내 그 잠재력을 다 실현하지 못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합니다.

지금 저에게 주목되는 것은 어떤 해석을 하든지 간에 그 해석자들이 아Q를 바라보는 시선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선들은 아Q를 내려다봅니다. 해석자들은 완벽한 각성을 한 초월적 위치에 있고 그 높은 자리에서 저 아래에 있는 어리석고 불쌍한 아Q를 내려다봅니다. 아Q의 혁명성에 긍정적으로 주목하는 해석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저는 이 시선에 반대합니다. 자신의 시선을 아Q와 같은 높이로 맞추고, 아Q와 수평적 관계를 이루는 것. 이것을 이 작품을 새롭게 읽는 방식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작중인물에 대한 단순한 감정이입과는 다릅니다. 감정이입이 아니라 일종의 연결이고 공명입니다. 한강이 말한 전류적 연결이나 루쉰이 말한 음향적 공명이 생각납니다. 한강과 루쉰은 작가와 독자 사이를 두고 한 말이지만 이를 작가와 작중인물 사이에서도, 그리고 작중인물과 독자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곳의 ‘나’가 1910년대 중국이라는 시공간에서의 아Q와 다를 바 없이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라는 인식이 핵심입니다. 이 인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기본 모티프로 갖습니다.

루쉰의 생애를 살펴보면 거기에서도 이러한 자기반성의 모티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0대 청년 시절에 계몽운동에 투신했고 참담하게 실패했던 루쉰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37세 때였는데, 그의 첫 작품인 단편소설 ‘광인일기’는 실패한 계몽운동을 광인의 모습으로 비유적으로 그렸습니다. ‘아Q정전’도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작품입니다. 지식인 출신인 광인도, 빈농 출신인 아Q도 모두 작가와의 수평적 관계 속에서 반성의 대상이자 주체가 되고 있습니다. 루쉰 문학의 비판적 역량은 바로 이 반성의 모티프로부터 나옵니다.

요즈음 제가 우려하는 것은 루쉰 문학의 비판성 자체에 대한 부정입니다. 이를테면 애국주의나 중화주의의 입장에서 루쉰의 국민성 비판을 거부하고 심지어 비난하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비난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년도 더 된 일이고, 최근 들어 부쩍 많아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됩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세계문학의 귀중한 자산이 된 루쉰 문학이 다른 곳도 아닌 중국에서 이런 식으로 비난받게 되다니, 한편으로 놀랍고 또 한편으로 몹시 걱정이 됩니다.

성민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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