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르신,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하겠습니까?”
“당…연하지.”
전화기 너머로 임창수(93)옹이 힘겹게 이렇게 답했다. ‘그때’는 75년 전 1950년 7월께다. ‘똑같이 하겠냐’고 물었던 것은 목숨을 걸고 낙오한 미군을 도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의 행적이었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하고 말도 어눌해진 그이지만, 당시 기억만큼은 또렷한 것 같았다.
북한의 기습적이고 불법적인 남침으로 일어난 6·25 전쟁 초반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형편없이 밀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선 최강이었던 미군이 5년간의 평화 속에 나사가 빠졌기 때문이다.
중학생 신분으로 북 감시 뚫고
낙오 미군에 식량 제공 구해내
주변에서 상훈 수여 힘썼지만
관료주의에 막혀 감감무소식

랠프 L 킬패트릭의 미 육군 제24 보병사단 제19연대 1대대 C 중대는 그해 7월 13~16일 금강 방어선 전투에서 졌다. 전체 중대원 171명 중 사상자가 122명이 나왔을 만큼 참패였다. 황급히 후퇴하는 과정에서 킬패트릭은 실종됐다.
그는 전투 도중 발목을 다쳤다. 그러면서 본대에 합류하지 못했고, 결국 동료와 함께 적 후방에 남겨졌다. 사방이 북한군 천지였다. 북한군은 미군 포로를 잡으면 바로 죽였다. 이성춘 전 군사편찬연구소장은 “당시 북한은 한시라도 빨리 한반도를 적화하려고 혈안이었기 때문에 포로를 수용소로 끌고 갈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포로를 즉결처분한 사례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북한군은 또 한국 군인과 미군을 숨겨주다 발각되면 가족 모두를 총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신고자는 포상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킬패트릭의 사단장인 윌리엄 F 딘 소장은 7월 20일 대전 전투 때 본대에서 떨어져 홀로 헤매다 8월 25일 한국인 2명의 밀고로 붙잡혔다. 고위급 포로의 값어치가 있는 딘 소장은 전쟁이 끝난 뒤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킬패트릭 일행이 살려면 더 남쪽에 있을지도 모르는 유엔군 진영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모든 게 낯선 한국에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틀 후 킬패트릭의 동료는 열사병으로 숨졌다.
병사와 소년의 우정
그는 불편한 다리로 산길을 헤쳐 영대리(세종특별자치시 연기군)까지 흘러왔다. 공주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전쟁통에 휴학하고 영대리 본가로 온 임옹과 우연히 마주친 게 7월 말, 8월 초였다. 킬패트릭은 덩치가 큰(키 185㎝) 데다 도피 생활로 수염이 덥수룩했고 행색이 남루해 임옹은 처음엔 큰 짐승인 줄 알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임옹이 배운 몇 마디 영어와 손짓·발짓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킬패트릭이 며칠을 굶은 걸 알게 된 임옹은 집에서 몰래 밥과 고추장을 훔쳐다 가져다줬다. 임옹은 앞서 북한군이 마을로 들어와 소를 뺏어간 데 단단히 화가 났었던 터였다.
임옹은 다음날 킬패트릭의 은신처로 먹을 것을 나르다 동네 주민인 성하영씨와 만났다. 그리고 성씨도 킬패트릭을 따로 몰래 돕는 걸 알게 됐다.
이렇게 해서 임옹과 성씨의 ‘비밀 보급 작전’이 시작됐다. 북한군이 마을과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면서 킬패트릭이 발각될 뻔한 순간도 있었다. 다행히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북한군이 패주했다.
10월 1일 미군이 근처를 지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임옹과 성씨는 킬패트릭을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 길에서 만난 미군 부대에게 킬패트릭을 넘겼다. 77일 만의 자대 복귀였다. 미국 사회가 그의 무사 귀환에 크게 기뻐했다.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킬패트릭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17살짜리 새 친구(임옹) 덕분”이라고 말했다.
킬패트릭은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찾아오겠다”며 임옹과 작별했다. 그러나 감감무소식이었다. 1971년 성씨가 세상을 떠나자 임옹은 부음이라도 전하려는 마음에 주한 미국대사관을 찾았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1972년 킬패트릭와 연락이 닿았다. 1972년 6월 26일 중앙일보는 ‘22년만의 喜報(희보)’라는 기사에서 임옹과 킬패트릭의 사연을 소개했다.
몇 차례 편지가 오갔다. 임옹은 1975년 킬패트릭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미국 뉴저지주 해밀턴의 킬패트릭 묘비엔 ‘미 육군 상사 2차대전-한국전쟁-베트남전’과 함께 ‘한국전쟁 중 77일간 적진 후방(에서 생환)’이라고 쓰여 있다.
고마움 전할 시간 많지 않아
임옹이 위험을 감수하며 킬패트릭을 보살폈지만, 그가 한국이나 미국 정부로부터 하다못해 감사장이라도 전달받은 적은 없다. 물론 어린 나이에 어떠한 보상을 바란 행동은 아니었다. 임옹의 친척인 임재한씨는 “아저씨(임옹)가 ‘우리를 위해 이역만리까지 온 사람인데,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보다 못한, 익명의 한 시민이 나섰다. 이 시민은 임옹이 상훈을 받도록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2년 동안 여러 곳에 민원을 줄기차게 제기했어요. 처음엔 국가보훈부·국방부·외교부를 찾았죠. 그런데 ‘보훈대상자가 아니다’(보훈부)라거나 ‘참전 용사가 아니다’(국방부), ‘6·25 전쟁은 국방부 소관이다’(외교부)라며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했어요. 중앙 부처가 어려우니 임옹의 거주지 지방자치단체인 세종시와 금남면에도 알아봤어요. 거기 답변도 ‘우리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어요. 주한 미8군에도 민원을 넣었는데 아직 답이 없습니다.”
지독한 관료주의 무한루프에 갇힌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임옹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 걱정이다. 그가 2019년 수술을 받은 뒤 건강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6·25를 ‘잊힌 전쟁(For gotten War)’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지만, 승전도 패전도 아닌 정전으로 끝난 6·25를 미국으로선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임옹에 대한 태도를 보면 우리가 먼저 6·25를 망각하려는 것 같다.
임옹은 비록 전쟁터에서 싸우진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작게나마 보탬이 된 것은 사실이다. 임옹의 큰 용기를 우리 사회가 선양해야만 한다. 그의 자부심을 오롯이 기려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