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계대출 성장세가 막힌 은행권이 외국인 시장을 새로운 활로로 삼고 있다. 국내 체류 외국인 265만명, 근로자만 100만명을 넘어서면서 4대 은행은 대출·송금·문화행사까지 외국인 맞춤 전략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다만 신용평가 인프라 부재, 언어 장벽, 낮은 수익성 구조 등은 풀어야 할 숙제로 남는다.
5일 금융권에 따르면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은 최근 외국인 전용 상품과 서비스를 연이어 출시하며 외국인 고객 기반 확대에 나서고 있다. 전용 대출과 문화 프로그램, 외국인 전용 영업점, 해외송금 서비스 및 다국어 전담 창구 등 외국인 금융 수요 선점 경쟁이 격화되는 모습이다.
지난달 27일 하나은행은 외국인 근로자 전용 신용대출 '하나 외국인 EZ론'을 내놨다. 최대 1000만원 한도, 최장 30개월 대출로 체류 기간과 비자 만기를 고려해 설계된 게 특징이다. 하나은행은 외국인 특화 일요 영업점 16곳에서 주말 상담을 지원하고 있고, 외국인 전용 적금·문화행사까지 이어가며 생활 밀착형 서비스로 고객 저변을 넓히고 있다.
신한은행은 최근 안산 원곡동에 '외국인중심영업점'을 열고 다국어 상담과 주말 영업을 지원한다. 또 신한카드와 협업해 신용이력 없는 외국인도 이용 가능한 예금담보 신용카드를 도입해 발급 절차를 대폭 간소화했다.
KB국민은행은 외국인 직접투자 설명회를 열고 투자자 대상 종합 컨설팅을 선보인 데 이어 해외송금 서비스 'KB 퀵 센드(Quick Send)'를 선보였다. 낮은 수수료와 신속한 송금으로 외국인 송금 수요 선점에 나서며 보험 서비스까지 확대했다는 평가다.
우리은행은 외국인 전담 '글로벌 데스크'를 전국 12곳으로 늘리고 네팔어 상담도 도입했다. 또 관광객 플랫폼 'WOKA'와 손잡고 환전·출금·결제를 한 번에 처리하는 서비스를 선보이는 등 거주 외국인뿐 아니라 관광객까지 아우르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가계대출 규제·저성장 속 외국인 금융 수요 급증
국내 은행들이 외국인 시장에 주목하는 가장 큰 배경은 급증하는 외국인 인구와 금융 수요다. 법무부 출입국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 체류 외국인은 약 265만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특히 취업자 수만 100만명을 넘어서면서 주거·교육·송금 등 생활 전반에서 금융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확대되는 추세다.
국내 외국인 임금 근로자 가운데 월평균 임금 300만원 이상이 37.1%를 차지하고, 이들의 신용카드 결제액(2023년 말 기준 56조2818억원)은 내국인 사용액의 약 7% 수준이다. 은행권 입장에서는 새로운 예금·대출·송금 고객층이 만들어진 셈이다.
가계대출 성장세가 막힌 상황도 외국인 시장을 바라보게 하는 배경이다. 정부의 부동산 대출 규제와 경기 둔화로 가계대출 증가세가 둔화하면서 주력 수익원이었던 가계대출은 성장 여력이 크게 줄었다. 이자수익을 더 늘리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외국인 시장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외국인 고객층 확대는 단순한 수익 창출을 넘어 포용금융 정책 기조와도 맞닿아 있다. 금융당국은 은행권에 상생금융과 포용금융 강화를 지속적으로 주문하고 있다. 가계부채 관리, 서민·중저신용자 지원, 금융소외계층 포용 확대를 주요 과제로 제시하며 은행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 시장 공략은 정부 정책과 발을 맞추는 행보로도 해석할 수 있다.
금융 소외계층에 속하기 쉬운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 가정의 금융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은행의 사회적 책임과도 연결된다. 금융당국의 압박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성장 절벽을 넘어설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인 셈이다.
다만 은행권의 외국인 시장 공략을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도 만만치 않다. 국내 신용평가 체계가 내국인 중심으로 설계돼 외국인 고객의 금융거래 이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체류 기간과 고용 안정성이 담보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대출 심사와 리스크 관리에서도 한계가 명확하다.
언어와 문화적 장벽도 여전히 높다. 외국인 고객이 몰린 지역 점포에서는 통역 인력이 부족하고 다국어 서류나 상담 채널이 미비한 경우가 잦다. 디지털 뱅킹도 한국어 중심의 앱 환경이 조성돼 있어 외국인에게 상당한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신한은행이 다국어 지원을 갖춘 예금담보 신용카드를 도입한 것도 이 같은 한계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수익성의 한계도 지적된다. 외국인 근로자 고객은 국내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본국으로 송금하는 경우가 많아 예금 기반 확대 효과가 크지 않다. 거래 금액도 소액이 많아 개별 고객당 수익 기여도가 낮고 전담 창구와 다국어 서비스 운영에 따른 비용 부담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인 시장 확대에 비해 성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체류 불안·신용이력 단절 한계···"파트너 협업해 서비스 넓혀야"
외국인 시장 공략을 본격화한 은행권은 신용관리 체계 고도화와 비이자수익 다각화를 숙제로 안고 있다. 외국인 맞춤형 신용평가 모델을 개발하고 송금·환전 수수료나 투자상품 같은 비이자 부문에서 수익원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동시에 모바일 앱과 콜센터 등 비대면 채널까지 다국어 지원을 확대해 고객 접근성을 넓히는 것도 필수 과제로 꼽힌다.
일각에서는 외국인 고객 기반 확대를 위해 우리보다 앞서 노력해온 글로벌 금융회사들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단순히 외국인 전용 상품을 내놓는 데 그치지 말고 글로벌 사례에서처럼 기술력과 네트워크를 갖춘 파트너와 협업해 서비스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제언이다.
대표적으로 스탠다드차타드는 핀테크 기업 와이즈와 협력해 송금 속도와 비용을 개선했고, 산탄데르은행은 리플의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송금 서비스 '원페이 FX'를 선보였다. HSBC가 노바크레디트와 손잡고 외국인의 본국 신용기록을 활용해 신용카드·모기지 상품 접근을 지원한 것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남경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금융기관도 해외 송금 경쟁력 강화, 외국인의 신용 공백 문제 해결, 외국인 커뮤니티 맞춤형 상품 개발, 글로벌 파트너십 확대, 인프라 및 고객 경험 개선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며 "외국인 고객을 부수적 시장이 아닌 핵심 타깃으로 설정하고 정착 단계별 맞춤형 금융패키지를 제공하는 등 장기 고객화 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