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정차하고 누구보다 먼저 내린 사람은 기사님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보니 휠체어를 탄 어르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은 잠시만 기다려달라 하고, 뒷문 쪽 바닥에 설치된 발판 고리를 힘껏 당겼다. 저상버스에는 휠체어가 타고 내릴 수 있도록 바닥에 접이식 발판이 설치되어 있다. 자동으로 작동하는 버스도 있지만 수동으로 고리를 당겨야 하는 버스도 있다.
몇번이고 시도해도 바닥 홈에 꽉 낀 고리는 꿈쩍하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뒤져 연필을 꺼냈다. “부러져도 괜찮으니까 이걸로 해볼까요?” 야속하게도 두 번째 시도에서 연필이 뚝 부러졌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정류장에서 다른 버스를 기다리던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와 “이걸로 한번 해보시죠” 하고 휴대용 전동 드라이버를 내밀었다. 두어번 작동하자 ‘탁’ 소리와 함께 고리가 빠졌다.
발판이 펼쳐지는 데 걸린 시간은 어림잡아 5분여. 통계적으로 도심 시내버스가 정류장에 머무는 평균 시간이 20초 남짓이라니 제법 길었다. 나는 연필이 부러지는 순간 기사님이 발판 작동을 포기하진 않을까, 승객들이 늦는다고 불평하진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발판이 펼쳐지자 모두 “됐네요, 됐어,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함이 밀려왔고, 이는 곧 ‘Sunny Scholar in 의성’ 프로젝트와 오버랩됐다. ‘Sunny Scholar’는 SK행복나눔재단의 청년 인재육성 사업이다. 청년들이 일정 기간 지역에 거주하며 사회문제를 발견,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로컬 현장연구형 프로젝트’로, 올해 대상지가 전국 최고 수준의 고령화율을 보이는 의성이었다.
3개 팀이 의성군 32개 마을을 돌며 지역을 관찰했다. 그중 한 팀이 ‘노인의 이동’에 주목했다. ‘실버카’로 불리는 보행보조기가 어르신들의 필수 이동수단이 된 현실 속에서, 청년들은 의아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면 단위에 거주하는 어르신들도 장날이나 병원 방문 때 읍내를 오가야 하지만, 버스에서는 실버카를 거의 볼 수 없었다. 저상버스 보급률이 낮아 버스에 실버카를 싣기 어려운 구조 탓이었다.
2006년 1월 교통약자의 이동권 보장을 명문화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시행은 저상버스 확산의 출발점이 됐다. 그러나 이후로도 오랫동안 저상버스 도입률은 미미했다. 2021년 법 개정으로 신규 노선버스는 저상버스 우선 도입이라는 행정지침이 강화됐지만, 도로 구조나 정류장 시설 문제로 운행이 곤란한 노선은 지자체가 예외 승인을 신청할 수 있다. 저상버스가 가장 필요한 지역에 가장 늦게 적용되는 아이러니다.
지역의 어르신들을 인터뷰한 청년들은 ‘노인의 이동’이라는 큰 주제 속에서 ‘실버카 사용 공백’을 구체적인 사회문제로 도출했다. 어르신들은 ‘불편한 것 없다’ 했지만 읍내 이동 시 실버카 대신 지팡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이동의 불안정과 장보기의 불편으로 이어졌다. 청년들은 해법으로 읍내에서 무료로 빌릴 수 있는 공유 실버카 ‘구르미’ 서비스를 제시했다.
프로젝트가 단순 실험에 그치지 않도록 청년들은 직접 구르미를 시범 운영했고, 어르신들은 높은 만족도를 표했다.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청년들은 의성군, 전통시장 상인회, 시니어클럽이 함께 참여하는 협력 구조를 설계했다.
지역사회가 구르미를 공공모빌리티 모델로 정착시킬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청년들이 지역에 머물며 그 세계를 이해하고, 새로운 ‘길’을 냈다는 데서 의미를 짚게 된다. 지역소멸과 청년 부재를 연결 짓고, 일시적인 거주 또는 창업 지원으로 발을 묶어두려는 기존의 정책적 시도와는 분명 다른 풍경이다.
한편, 장애인 출근길 시위 뉴스에 온갖 악플이 달리는 현상과 달리, 저상버스의 발판과 공유 실버카 사례는 일상 곳곳에서 함께 발맞추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책이 시민의 성숙도를 부단히 따라잡고, 시민이 정책의 허점을 보완하려 나설 때, 이동권 문제는 물론 사회 곳곳의 ‘거리감’까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공공의 길은 결국 정책과 시민의 발걸음이 서로를 이끌 때 단단해진다.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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