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계엄의 밤, 軍차량 막은 회사원·707 맞선 대학생 "화합의 길 가야"

2025-12-02

지난해 12·3 계엄날 밤 국회 앞에서 계엄군 차량을 막아 섰던 회사원 진성민(56)씨는 계엄 1년을 돌아보면서 “그날 젊은 군인들이 굉장한 자제력을 발휘했다. 기도한 대로 총성은 한번도 울리지 않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학교 도서관에 기말고사 공부를 하다가 국회로 달려와 국회의사당 본관 정문 앞에서 707특임단과 대치한 대학생, 밤새 국회 앞에서 “계엄 해제”를 외쳤던 이들까지 그날 현장에 있던 시민 5명의 계엄 1년을 맞은 소망도 국민 모두가 입은 상처의 치유와 화해였다.

잠옷 입고 서강대교 질주한 50대 가장… ‘총성 제발 안울리길’ 기도

그날 진씨는 다음날 출근을 위해 오후 10시쯤 잠에 들었다. 뉴스를 보던 아내가 비상계엄이 선포됐다며 그를 깨웠다. 그는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친 채 고양시 집을 나섰다. “군인들이 국회에 갈텐데 얼른 막아야 한단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아들이 막아섰지만 “그때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하는 일이 있다. 지금이 그때”라고 설득했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서강대교에서 차가 막히자 중간에서 내려 약 1km를 전속력으로 달렸다. 밤하늘을 가르는 군용 헬기를 보면서 “지금 아니면 못 막는다. 꿈이 아니다”란 생각만 맴돌았다.

국회 앞에 도착하자 야간투시경을 쓴 군인과 담장을 에워싼 경찰이 보였다. 진씨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때, 국회 건너편에 생소한 차들이 보였다. 안테나와 군 사령부 번호판을 단 군용차였다. 지휘관급이 탔을거란 확신이 들었다. 곧장 무리에서 빠져나와 차 앞을 막아섰다. 차가 이동하면 군의 추가 움직임이 있을 수 있으니 방해해야겠단 생각이었다. 서강대교쪽 담장이나 국회 뒤편엔 시민이 많지 않아 군이 가면 금세 뚫릴 것 같단 불안감이 컸다. 그렇게 그는 다음날 새벽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될 때까지 서너 대의 군용차 앞을 서성였다. 총성이 울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며.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국회 지킨 대학생들

같은 시간, 대학생 한성일(21)씨는 국회 본관 앞에서 707특수임단과 대치했다. 겹겹이 선 시민들과 본관에 진입하려는 군인 100여명을 한 시간 넘게 몸으로 막았다. 같은 장소에서 약 1년 뒤 만난 한씨는 “서로 밀고 밀리는 상황에서 한 대원에게 옆구리를 찍히기도 했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 서대문구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 시험 공부를 하다 뉴스를 보고 곧장 국회로 달려가 담을 넘었다. 한씨는 “구속될 수도 있겠단 걱정도 들었지만, 어차피 계엄 후엔 일상적인 생활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며 “총을 보고 다신 부모님을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대학생 김철규(26)씨와 황여준(24)씨는 당시 국회 1문 근처에서 각자 “계엄 해제”를 외쳤다. 김씨는 국회 1문을 닫으려는 경찰에 맞서 문을 잡고 버틴 시민 중 한명이다. 그는 “경찰이 의원들도 못 들어오게 막아서 국회 안 사람들이 손을 잡아당겨 들어올 수 있게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황씨는 테이저건에 맞을까 가죽자켓을 챙겨 입고 국회 담장에 올라 계엄 해제안이 의결될 때까지 상황을 지켜봤다. 충돌이 발생하면 바로 달려가 저지하려는 생각이었다.

사진작가를 지망하는 임은재(26)씨는 그날 국회 담벼락 근처를 뛰어다니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엔 폴리스라인을 뛰어넘는 시민과 경찰 버스 등 현장 모습이 담겼다. 그는 “사진 찍는 사람으로서 오로지 역사적 현장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장갑차가 온단 소식을 듣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현상을 기록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버텼다”고 했다.

이처럼 수많은 시민들이 국회 앞을 지켰고, 계엄은 하룻밤 만에 끝났다. 하지만 허탈함은 1년 동안 그들의 삶 속에 머물렀다. 계엄을 옹호하는 사람들, 반성대신 그들을 부추기는 핵심 가담자들의 모습을 보며 회의감도 들었다고 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지켜봤던 진씨는 인터뷰 중 “잊혀진 희생과 노력들로 우리나라가 강해져 왔는데, 그 모든 게 한순간 물거품이 될까 화도 나고 억울했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씨는 그전까지 했던 사회과학 스터디 활동을 거의 그만뒀다. “계엄 직후엔 앉아서 사회 문제를 논하는 게 다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황씨는 계엄 이후 갈라진 사회를 보며 “광장 민주주의라는 게 애초에 존재하는 건가하는 비관적인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긴 예방주사의 시간…튼튼한 민주주의 만들자” 희망 말한 그들

김씨는 “그날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이 한번 무너졌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을 미래세대에까지 물려주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계엄 때 본 놀라운 시민의식과 공동체성이 또한 희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희망처럼, 지난 4월까지 집회를 위해 자주 광장에 나서며 약해졌던 그의 몸도 최근 들어 많이 회복됐다고 했다. 황씨 역시 ‘봉합’이란 말을 꺼냈다. 그는 “계엄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조차 분열됐던 것 같다”며 “이젠 한마음으로 뭉쳐 계엄이 희화화되지 않게, 단단한 지지선을 구축했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진씨는 당시 군·경의 모습에서도 희망을 봤다고 했다. 그는 “그날 서로를 조금이라도 자극했다면 바로 피바다가 될 수 있었는데, 공포탄 소리 한번 울리지 않게 해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고 전했다. 이어 “지난 1년 동안 굉장히 센 예방주사를 맞고 있는 것 같다. 잘 이겨내면 예방 주사인 것이고, 못 이겨내면 병에 걸릴 것이다. 계엄으로 우리 사회에 상당한 충격과 아픔이 있었지만, 더 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선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제대로 된 치유와 회복을 통해 트라우마를 희망으로 바꿔야 할 때라고 진단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정찬영 광주동명병원 대표원장은 “계엄으로 국격이 손상되고, 국민들의 정체성까지 하루아침에 부정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일종의 ‘정체성 트라우마’를 겪는 것”이라며 “이젠 공동체 차원의 치료와 위로가 필요한 시기”라고 설명했다. 현진희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그날 나섰던 시민들과 군·경 등 많은 분들이 상처를 입었지만, 잘 치유할 수 있다면 한국이 앞으로 더욱 나아갈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를 위해 정치권이 제역할을 해야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이야 말로 정치가 필요한 시간”이라며 “상처를 되돌아보고, 갈등 이후의 사회 비전과 전망을 세우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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