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모으고 스토리 재구성하는 싱가포르의 브랜드 전략

2025-12-09

싱가포르 창이 공항 면세점. 한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사는 건 명품 가방도 시계도 아니다. ‘바샤 커피’다. 화려한 금박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면세 구역을 가득 메우며 마치 새로운 명품을 구매한 듯한 인상을 준다. 1910년 모로코에서 시작됐다는 서사를 내세우는 이 브랜드는 사실 2019년 싱가포르에서 기획해 만들어졌다. 이것이 싱가포르가 설계한 럭셔리 브랜딩의 결과다.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과 구매력

아시아 테스트 베드 된 싱가포르

브랜드 경험 설계 능력 배워야

서울에도 디올 하우스와 구찌 오스테리아가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는 프라다와 랄프 로렌, 오데마 피게, 코치까지 럭셔리 브랜드 F&B 매장이 즐비하다. 더 중요한 건 ‘최초’라는 타이틀이다. 프라다의 ‘아시아 최초 카페’, 코치의 ‘전 세계 유일 F&B 3개 동시 운영’, 프랑스 호텔 마마 셸터의 ‘아시아 첫 진출’. 왜 이 타이틀들은 서울이 아닌 싱가포르에 붙는가.

싱가포르의 전략은 명확하다.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 차 한 잎, 커피 한 톨 나지 않는 도시국가에서 탄생한 TWG 티와 바샤 커피는 각각 ‘차의 에르메스’와 ‘커피의 에르메스’로 불린다.

TWG 티는 2008년 창업했지만 로고에 ‘1837’을 새겼다. 싱가포르 상공회 설립 연도다. 브랜드 설립 연도가 아니라 싱가포르가 세계 무역항이 된 해를 빌려온 것이다. 바샤 커피는 로고에 ‘1910’과 ‘Marrakech’를 새겼다. 모로코 다르 엘 바샤 궁전이 커피 살롱으로 문을 연 해를 차용했다. 이 건물은 2차 세계대전 때 사라졌다가 2017년 바샤 커피가 실제로 매장을 열며 부활했다.

영리하고 교묘한 헤리티지 브랜딩이다. 소비자가 역사를 착각해도 고급 이미지는 유지된다. 핵심은 ‘제품이 아니라 스토리와 경험을 판다’는 것이다. TWG는 1000여개의 차를 ‘티 소믈리에’가 안내하고, 바샤는 모로코풍 인테리어와 자기·은 식기로 커피 한 잔을 럭셔리 경험으로 만든다. 바샤 카페는 1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사람들은 기꺼이 줄을 선다.

생산지 없이 글로벌 브랜드 만들어 내

이러한 전략의 결과는 놀랍다. TWG는 론칭 후 불과 수년 만에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했으며, 바샤 커피는 2019년 출시 후 4년 만에 매출 9600만 달러를 기록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24년에는 모로코 공장을 8배 확대하고, 파리 샹젤리제에 2000만 유로를 투자했다. 생산지 없이도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글로벌 브랜드가 싱가포르를 아시아 실험실로 삼는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다문화 소비 시장 및 쇼케이스 효과다. 싱가포르에는 중국계와 말레이계, 인도계 주민에 더해 서구 외국인이 상주하고 연중 관광객이 몰려든다. 이 같은 다문화 환경은 한 번의 실험으로 여러 문화권의 반응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아시아 소비자 테스트 베드’로서 이상적인 환경이다.

둘째, 정치와 규제의 안정성이다.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은 글로벌 브랜드의 실험적 시도에 있어서 실패 리스크를 최소화한다. 명확한 계약과 지적재산권 규범이 신제품 론칭의 안전장치가 된다.

셋째, 높은 구매력과 확장성이다. 인구는 600만명에 불과하지만 24만명이 넘는 백만장자가 살고 있고 부유층의 53%가 향후 1년 내 럭셔리 경험에 더 지출할 계획이다. 싱가포르에서의 성공은 곧 아시아 전역으로의 자연스러운 확산으로 이어진다. 마커스 샌더스 코치 부사장은 “싱가포르에서 얻은 인사이트는 다른 아시아 시장으로 이전하기 용이하다”고 말했다.

다문화, 소비 실험 시장 가진 싱가포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나라 중 하나다. K팝과 K드라마가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고 기술 혁신을 주도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우리 것을 ‘럭셔리 경험’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전통주와 한복, 도자기, 한지, 자개. 모두 깊은 역사와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지만 ‘궁중 양조법’과 ‘조선 왕실 의상 헤리티지’ 같은 매혹적인 서사를 럭셔리 브랜드로 전환하는 데는 아쉬움이 남는다.

싱가포르는 생산지가 아니라는 약점을 오히려 특정 원산지에 얽매이지 않고 전 세계의 스토리를 빌려오는 능력으로 치환했다. 반면 한국은 실제 생산지이면서도 원산지가 브랜드를 압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차이는 경험 설계 투자에 있다. 바샤 커피의 싱가포르 매장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한국 청담 플래그십은 일반 커피가 1만 원대, 초고가 메뉴는 한 포트에 48만원까지 책정돼 공격적인 가격 전략을 취한다. 높은 가격의 근거는 원두의 품질이지만, 이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게 하는 것은 디테일이다. 바샤 커피의 모든 식기에는 로고가 각인돼 있고 일회용 냅킨도 자카드로 직조했다. 영수증조차 금박 로고 인쇄된 카드에 넣어준다. 커피 한 잔에 이 정도 디테일을 투자한다. 이것이 럭셔리 브랜딩이다.

헤리티지 스토리의 브랜드화 나서야

1인당 국민소득 9만 달러, 효율적 시스템, 청렴성. 싱가포르는 한국이 배워야 할 모델로 여겨졌다. 여기에 더해 이제는 싱가포르가 TWG와 바샤 커피로 증명한 헤리티지 스토리텔링과 경험 설계 능력, 안정성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글로벌 자본과 스토리를 영리하게 모으고 재구성하는 큐레이션 역할까지 배워야 한다. 싱가포르의 금융 허브는 K스타트업 투자 유치에, 동남아 네트워크는 K브랜드의 시장 진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바샤 커피 쇼핑백을 든 한국 관광객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쇼핑백에 담긴 전략은 냉철히 분석해야 한다. 싱가포르는 스토리를 빌려와야 했지만 한국은 이미 2000년에 이르는 헤리티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한국은 역동성과 실험 정신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K드라마의 예측 불가능한 에너지는 통제된 안정성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자산이다. 서울과 부산은 글로벌 핫플레이스로 자리했다. 부족한 건 스토리가 아니라, 그 스토리를 영수증 한장에까지 입혀내는 집요함과 디테일이다.

고영경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디지털통상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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