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미래를 향한 샤넬의 발걸음 [더 하이엔드]

2025-12-08

럭셔리 브랜드와 예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많은 브랜드가 예술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어왔고, 예술가에게도 브랜드는 창조의 원천이 되어왔다. 협업 제품으로 예술에 경의를 표하는 브랜드도 많지만, 샤넬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단기 후원보다 지속 가능한 창작 환경을 구축하는 데 집중한다. 예술가가 때로는 실패하고 성장하며 오래도록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진정한 관계가 형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샤넬과 예술

샤넬의 예술 후원 활동은 100년 전,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 그 자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유롭고 대담한 삶을 추구했던 그는 진실한 우정과 열정적인 사랑을 원동력으로 삼고 브랜드를 디자인했다. 중심에는 예술가들이 있었다. “나에게 엄격함을 가르친 건 예술가였다”는 그의 말처럼, 가브리엘 샤넬은 열렬한 예술 애호가이자 그들의 친구였다.

프랑스 리비에라에 위치한 별장 ‘라 파우자(La Pausa)’는 샤넬이 예술가를 위해 마련한 환대의 공간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장 콕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시대를 이끈 창작자들이 이곳에 머물며 작업에 몰두했다. 살바도르 달리가 라 파우자에 6개월 이상 거주하며 뉴욕 전시를 위한 작품을 그린 건 유명한 일화다. 샤넬은 라 파우자를 일종의 예술가 레지던시로 활용한 셈이다.

예술에 대한 가브리엘 샤넬의 헌신은 오늘날 ‘샤넬 컬처 펀드(CHANEL Culture Fund)’로 이어진다. 마치 라파우자가 당대의 예술가를 위한 보금자리가 됐던 것처럼, 전 세계 문화 형성에 기여할 아이디어를 품는 곳이다. 미술관이 진취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돕는 ‘샤넬 아트 파트너스’, 창작 자금과 멘토링을 지원하는 ‘샤넬 넥스트 프라이즈’, 다채로운 분야 거장의 대화를 팟캐스트로 풀어낸 ‘샤넬 커넥츠’ 등은 예술가들에게 든든한 나침반이 된다.

올해 국내에서도 폭넓은 활동이 이어졌다. 재단법인 예올, 프리즈(FRIEZE SEOUL) 등과 협력해 기성 작가와 신진 작가를 연결하는 건 물론, 리움미술관과 함께 예술 실험실을 만드는 ‘아이디어 뮤지엄(Idea Museum)’도 진행됐다. 부산국제영화제(BIFF)와 함께 영화인 조명과 양성에도 힘썼다.

장인과 신진 작가의 만남

샤넬은 올해도 한국 공예 후원 사업을 전개하는 재단법인 예올과 함께 ‘올해의 장인, 올해의 젊은 공예인’프로젝트를 성황리에 마쳤다. 샤넬과 재단법인 예올은 장인정신을 기리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공통된 방향성을 토대로 2022년 파트너십을 체결, 4년째 장인을 위한 등대 역할을 하고 있다. 옻칠 공예부터 화각 공예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재료와 기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장인과 젊은 공예인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동안 샤넬은 금박과 옻칠, 화각과 도자, 대장장이와 유리라는 상반된 재료와 작업 방식을 갖춘 작가들을 모았다.

올해는 지호장 박갑순과 금속공예가 이윤정을 각각 올해의 장인과 젊은 공예인으로 선정했다. 박갑순 장인은 1999년 전주시 전통 한지 공예 교육을 계기로 지호 공예에 매료돼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작업하고 있다. 이윤정 작가는 금속을 소재로 주변에 늘 존재하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들을 탐구한다. 두 사람은 지난 8월부터 두 달간 이어진 전시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에서 호흡을 맞추며 종이와 금속이라는 서로 다른 물성을 지닌 재료를 조화롭게 풀어냈다. 박갑순 장인은 전통 민화에서 영감을 받아 동식물 형태의 기물을 빚어냈고, 이윤정 작가는 주석으로 제작한 가구를 선보였다. 작품들은 흐름과 조화,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예술의 현재와 미래

샤넬은 프리즈 서울과 4회차 ‘나우 앤 넥스트(NOW & NEXT)’ 비디오 시리즈도 이어갔다. 2022년 국내 최대 아트페어인 키아프(Kiaf)와 세계 2대 아트페어 프리즈가 서울에서 동시에 열리기 시작했다. 샤넬은 이때부터 프리즈 서울과 파트너십을 맺고 기성·신진 작가를 연결해 비전을 논하는 나우 앤 넥스트 시리즈를 후원해 왔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일부가 되어라”는 가브리엘 샤넬의 정신을 세대 간 예술적 교감으로 풀어낸 것. 올해는 김윤철과 전소정, 김보희와 정유미, 이진주와 임노식 등 6명의 작가가 각각 ‘나우’와 ‘넥스트’로 짝을 이뤘다.

참여한 작가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왔다. 김윤철 작가는 기술을 예술에 접목해 다양한 매개체를 이용한 작품을 선보였고 전소정 작가는 영상과 글로 현대 미학과 정치적 맥락을 탐구한다. 김보희 작가는 회화로 자신의 세계를 포착, 정유미 작가는 추상적인 풍경을 전통 기법으로 탐색한다. 이진주 작가는 일상과 무의식 속 낯선 장면을 동양화의 채색 기법으로 풀어내며, 임노식 작가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회화로 포착하려고 시도한다.

임 작가는 “기성 작가들도 신진 작가였던 시절이 있고, 신진 작가도 누군가에게는 이미 많은 것을 이룬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며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작가들의 만남 역시 프리즈 서울이 끝난 후에도 지속하고 있다.

시간에 물음표를 던지다

미술관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색다른 도전을 하도록 돕는 것 역시 샤넬 컬처 펀드의 핵심 역할이다. 샤넬은 미국 시카고 현대미술관,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기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독창적인 시도를 이어갔다. 국내에서는 2023년 리움미술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공공 프로그램 아이디어 뮤지엄을 운영했다. 전 세계의 예술가·철학자·과학자가 모여 하나의 주제를 심도 있게 탐구하는 일종의 예술 실험실이다.

첫해에는 ‘생태적 전환: 그러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를 주제로 기후 위기를 조명했고, 이듬해에는 ‘에어로센 서울’을 통해 탈탄소화에 대해 논의했다. 올해는 ‘블랙 퀀텀 퓨처리즘: 타임 존 프로토콜’로 시간의 개념에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절대적이라 간주된 시간 개념이 서구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아닌지 되묻고, 의문을 통해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읽기 방식을 제안한다.

프로젝트는 샤넬 넥스트 프라이즈의 지난해 수상자 카메이아예와(Camae Ayewa)와라시다 필립스(RasheedahPhilips)의 작품을 다뤘다. 두 작가는 전세계에 흩어진 흑인들의 민족성을 양자물리학과 아프리카 고유의 시간관에 연결지어 대안적 시간 개념을 제안해왔다. 전시는 영국 그리니치가 본초자오선으로 지정된 1884년 국제 자오선 회의에 의문을 제기하며 출발했다. 인종적·사회적 시간 통제의 역사를 교차적으로 드러내 서구의 직선적 시간 개념을 해체하기도 했다. 퍼포먼스·설치·음악·글쓰기 등을 통해 ‘시간대’를 다시 그려내는 시도도 이어졌다.

한편, 올해 아이디어 뮤지엄 심포지엄은 ‘인 더 미들 보이스(In the Middle Voice): 다섯 개의 움직임’을 주제로 진행됐다. 세계적인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 Ingold)의 사유와 실천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새로운 배움의 방식을 모색하는 내용을 다뤘다. 이어 인간과 사물, 환경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과정을 탐구했다.

차세대 영화인과의 만남

영화인에게 부산국제영화제가 가진 위상은 굳건하다. 샤넬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영화제와 두 가지 이벤트를 함께했다. 바로 아시아영화아카데미와 까멜리아 어워드다. 아시아영화아카데미는 2005년 영화계 신예를 발굴하기 위해 설립됐다. 코로나19로 영화 산업이 직격탄을 맞은 2022년, 샤넬은 한층 확장된 커리큘럼을 갖출 수 있도록 아시아영화아카데미와 손을 잡았다. 영화인이 멘토에게 직접 실무 교육과 조언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협업 첫해에는 캄보디아 출신 리티 판 감독이 교장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일본 연출계에서 주목받은 스와노부히로 감독이 학생들을 이끌었다. 올해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과 ‘악마를 보았다’(2010) 등으로 탁월한 연출을 보여준 김지운 감독이 교장으로 위촉됐다. 여기에 ‘찬탈리’(2013)로 주목받은 라오스 출신 영화감독 매티 도와 ‘악녀’(2017)로 칸 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받았던 박정훈 촬영감독이 각각 연출 멘토와 촬영 멘토를 맡았다. 올해는 아시아 17개국에서 모인 24명의 창작자가 참여해 각자의 개성을 담은 단편영화 8편을 완성했는데, 프로그램 설립 이후 가장 많은 40개국에서 625명이 지원해 화제를 모았다.

여성 영화인 조명하는 까멜리아 어워드

올해로 2회차를 맞은 까멜리아 어워드도 눈길을 끌었다. 여성 예술가를 지원하는 것은 샤넬 컬처 펀드의 사명 중 하나다. 까멜리아 어워드는 부산의 시화이자 가브리엘 샤넬이 사랑한 동백꽃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 산업에서 여성 전문가들의 기여를 알리기 위해 제정됐다. 지난해 첫 수상자로는 ‘아가씨’(2016)로 칸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 벌칸상을 수상한 류성희 미술감독이 꼽혔다.

올해는 대만 출신 배우이자 감독·프로듀서·시나리오 작가로 50여 년 활동해온 실비아 창이 수상했다. 실비아 창은 1973년 ‘용호금강’으로 데뷔한 이래 1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으며 창작자를 지원하는 ‘고쉬재단(Gosh Foundation)’을 설립, 꾸준히 신진 감독을 발굴했다. 올해 까멜리아 어워드는 그의 노력을 온전히 조명하는 자리였다. 창은 “도전의 순간들이 앞으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소감을 밝혀 영화인들에게 울림을 줬다. 이후 영화에 헌신한 그의 삶과 성취를 돌아보는 스페셜 토크 세션에서 수많은 이들과 경험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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