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유물이 아니다... 혁신 기술력 탑재해 귀환한 탁상시계 [더 하이엔드]

2025-12-08

과거의 찬란한 유물 정도로 치부되던 탁상시계가 각 브랜드의 기술력과 창의성을 강렬하게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캔버스가 됐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업계 자체는 물론 소비자 사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탁상시계 그 이상

시계 업계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의 2025 시상식이 지난 11월 13일에 열렸다. 올해 대상인 에귀유 도르(Aiguille d'Or, 황금 바늘)는 브레게가 설립 25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서브스크립션 2025’에 돌아갔다. 이밖에 남녀 시계, 여러 부문의 컴플리케이션, 스포츠∙주얼리∙아티스틱 워치 등 20여 개 부문의 수상작도 가려졌다. 그런데 올해, 지난해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시계 업계에 공을 세운 인물에게 주는 특별상을 제외하면 그간 모든 상이 ‘손목시계’에 집중돼 있었던 GPHG에 새로운 부문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기계식 탁상시계상(Mechanical Clock Prize)’이다.

안톤 수하노프(Anton Suhanov), 피오나 크뤼거(Fiona Krüger), 미키 엘레타(Miki Eleta), 트릴로베(Trilobe) 등 독립 시계 제작자와 더불어 하이엔드 시계 분야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루이 비통, 정통 탁상시계 브랜드인 레페(L’Epée) 1839의 작품이 후보에 올랐다.

수상의 영예를 안은 건 레페 1839의 ‘알바트로스’. 고급 시계 분야의 이단아로 불리며 종전에 없던 제품을 선보이는 브랜드 MB&F와 협업을 통해 내놓은 이 모델은 정각과 30분마다 소리로 시간을 알리는 동시에 총 16개의 프로펠러가 회전하는 극적인 장관을 연출한다.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후보작 역시 시간 측정의 기능을 넘어 오브제로서의 존재감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탁상시계를 향한 전통 브랜드의 꾸준한 관심

기계식 탁상시계의 부활은 이미 수년 전 시작됐다. 독립 제작자는 물론 ‘메이저’ 워치 브랜드들이 앞다퉈 제품을 내놓고 있다. 반클리프 아펠, 샤넬은 몇 년간 워치스&원더스 시계 박람회에서 기술력과 창의성을 집약한 탁상시계를 꾸준히 공개해왔다. 전 세계 단 한 점만 제작되는 유니크 피스이거나 극소량 한정판으로 선보이는 이 시계들은 브랜드의 예술성을 압축해 드러내는 또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바쉐론 콘스탄틴도 브랜드 설립 270주년을 기념해 6000여 개 부품으로 구성된 ‘라 꿰뜨 뒤 떵’을 선보였다. 움직임을 구현한 오토마통, 세 가지 멜로디를 구현하는 음악 장치를 비롯해 23개 기능을 갖춘 이 거대한 탁상시계는 판매용 제품은 아니지만, 스위스 워치메이킹과 장식 공예의 정수를 대중 앞에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탁상시계가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기 전부터 꾸준하게 명맥을 이어온 브랜드도 있다. 예거 르쿨트르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정규 컬렉션에 ‘애트모스(Atmos)’라 불리는 탁상시계를 전개하고 있다. 온도와 공기 압력의 미세한 변화만으로 움직여 거의 에너지를 쓰지 않는 독보적인 시계로, 케이스 내부의 가스 캡슐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태엽을 감도록 설계됐다. 덕분에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시계’로 불리기도 한다.

1928년 처음 선보인 이후 예거 르쿨트르는 애트모스의 기술과 디자인을 계속 발전시켜왔으며, 지난 가을에도 화이트 래커 다이얼을 탑재해 모던한 디자인을 강조한 ‘애트모스 인피니트 헤일로’를 새로 내놔 주목을 받았다.

파텍 필립은 매년 ‘돔 테이블 클락’을 통해 정교한 공예 기술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에나멜링, 마케트리(쪽매 맞춤), 미니어처 페인팅 등 장인의 수작업을 돔 형태 케이스에 구현한다. 매년 다른 디자인의 탁상시계 서너 가지를 선보이며, 소량 생산하는 탓에 전 세계 시계 애호가의 수집대상으로 꼽힌다.

한편, 롤렉스는 올해 브랜드의 베스트셀링 모델인 서브마리너 데이트의 케이스 디자인을 본뜬 탁상시계를 ‘조용히’ 내놓았다. 지름 80㎜ 크기에 스틸로 만든 이 시계는 ‘롤렉스 마니아’ 사이에 선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파네라이∙파르미지아니 등 기타 하이엔드 브랜드도 간간이 클록을 선보이고 있다.

돌아온 탁상시계의 의미

탁상시계의 재부상은 단순한 복고 트렌드로 설명할 수 없다. 팬데믹을 거치며 최근 몇 년간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시장 환경이 변화하면서, 시계의 의미는 손목 위에 차는 물건을 넘어 공간을 채우는 오브제 혹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확장되고 있다. 회화나 조각 작품을 들이듯 탁상시계를 선택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으며, 극소량 제작되는 희소성은 경매와 컬렉터 시장에서 그 가치를 더욱 끌어올리고 있다. 올해 GPHG에서 수상한 레페 1839가 국내에 부티크를 연 것도 이러한 시장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브랜드 입장에서 탁상시계는 손목시계보다 훨씬 넓은 창작의 여지를 제공하는 장르다. 크기와 구조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점차 사라져가는 장인 기법을 보전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탁상시계는 취향과 예술성을 담아내는 동시대의 오브제로서, 하이엔드 시계 분야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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