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주일간 경북 북부를 초토화시킨 ‘괴물 산불’이 진화되면서 역대 최대 산불 피해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경북도 집계에 따르면 2022년 울진·삼척 산불 피해액(9085억원)을 넘어 1조원을 넘길 전망이란다. 여기엔 국가유산청이 지난 1일 집계한 총 33건(국가유산 기준)의 문화유산 피해도 포함된다. ‘천년 고찰’을 자랑하는 의성 고운사의 경우 보물로 지정된 가운루와 연수전이 잿더미로 변했고 청송 사남고택, 안동 지산서당 등도 전소됐다. 자산가치로 가늠하기 힘든 수백 년 세월이 녹아버렸다.

그나마 반가웠던 소식은 안동 만휴정의 무사생환이다. 지난달 25일 화마가 뻗치면서 한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다음 날 큰 피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 16세기 초 문신인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 지었다는 이 정자는 주변 원림(숲)까지 아름다워 2011년 국가지정 명승이 됐다. 그렇다 해도 이곳이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의 촬영지가 아니었다면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졌을 리 없다. 이번 산불 때 가슴을 졸이게 만든 안동 병산서원도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인지도를 높였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KBS 드라마 촬영팀이 이곳 만대루(보물)에 못을 박고 훼손시킨 사건 탓에 유명세를 더한 건 아이러니다.
사람에겐 어떤 장소와 강한 관계를 형성하면 그곳을 자신의 정체성 일부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장소 애착 이론’). 나아가 꼭 방문하진 않아도 역사적인 배경이나 문화적 의미를 알면 감정적 애착을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내러티브 교감 효과’). 2019년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때 세계인들이 애도한 것도 한 번쯤 가 본 추억 외에도 노트르담을 둘러싼 많은 소설·영화의 잔향 때문이다. 만휴정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계곡물을 가로지른 통나무다리에서 애신(김태리)에게 유진(이병헌)이 “합시다, 러브. 나랑 같이” 하던 장면을 잊긴 어렵다. 2008년 숭례문이 불타는 걸 지켜본 상실감에 또다시 생채기가 덧날 뻔했다.
일각에선 만휴정에 화마가 접근하기 전 촘촘히 씌운 방염포(화재 차단용 특수 천)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실제 효과는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화재 진압 현장 인력을 포함해 무수히 애쓴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 그나마 참화를 줄인 건 분명하다. 문화재의 가치와 관련해 “많은 시간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해진 작품들은 더 이상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김영복, 『옛것에 혹하다』)고들 한다. 문화유산이 각별한 건 그 긴 시간을 버티게끔 지키고 가꿔 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힘입는다. 달리 말해 이를 훼손하는 건 그 노력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함께 보호하고 애쓴 기억의 교집합이 많을수록 공동체가 단단해진다. 과연 문화유산만 그러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