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벨경제학상에 이론 부문만 있는 게 아니라 실무 부문도 있다면 누가 수상자가 될까? 훌륭한 이론을 만들어내는 학자에게는 이론 부문 노벨상을 주고, 기존에 있는 이론들을 현실에 적용해서 잘 써먹는 사람에게는 실무 부문 노벨상을 준다면 말이다. 제1회 수상자는 단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될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은 전통적인 주류경제학의 영역을 확장해가면서 게임이론이나 행동경제학 분야의 수상자도 여럿 배출했다. 트럼프는 바로 이 분야의 이론들을 현실에 적용해서 성공을 거듭해온 전략가이다.
첫 회담부터 난제와 마주선 한국
관세, 방위비, 대중 견제까지 겹쳐
불리한 의제 안고 냉혹한 무대로
특유의 실용 정신으로 선전 기대
8월 25일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에서 테이블 위에 올라올 의제들은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관세 협상의 마무리,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재배치, 대중국 견제에 한국 참여, 북핵 등이다. 관세 협상은 15%로 일단은 비교적 선방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일본이나 스위스 사례에서 보듯이 방심할 수는 없다. 방위비 분담금은 작년에 비준된 분담금 협정에도 불구하고 최대 10배까지 올리겠다는 발언까지 나와 있는 상태이다.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확보를 위해 4500명 규모로 추정되는 미군을 한반도에서 옮기겠다는 구상은 이미 되돌리기 어려워 보인다. 1기 집권 때 북핵 문제 해결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트럼프는 동맹을 압박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북한에 대해 유화적 발언을 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 불리한 의제들을 가지고 협상 전략의 노벨상감인 트럼프를 상대해야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트럼프 전략의 핵심은 이런 것들이다. 첫째로, 그는 협상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상대방의 선택을 제약해버린다. 협상이 실패했으니 관세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25% 관세를 시행해놓고 이걸 얼마나 내려줄 것인가를 협상한다. 상대방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어갈 기회를 처음부터 잃어버리고 트럼프의 요구를 어디까지 들어줄 것인지 대답만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미국은 이미 한국에 대해 25% 관세와 방위비 분담금 최대 10배 인상과 같은 제약조건을 던져놓고 시작했다. 반면 한국은 미국에 대해 아무런 제약조건도 부과하지 않았다. 비교적 선방했다고 평가받는 관세 협상에서조차 한미FTA에 따라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0%를 기준으로 삼았다. 현실적인 국력의 격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상대가 위협으로 느낄 수 있는 아무런 조건 없이 자칫 묻는 말에 대답만 하는 정상회담은 위태로워 보인다.
둘째로, 트럼프는 위험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활용한다. 행동경제학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얻는 것보다 이미 가진 것을 잃는 것을 훨씬 더 피하고 싶어한다. 트럼프는 협상을 거부할 경우 마주치게 될 파국적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이것을 피하고 싶은 상대 국가의 본능을 이용해 양보를 얻어낸다. 2차대전 이후 경제적·안보적으로 미국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잃을 것이 너무나 많다. 반면 동맹이 훼손될 경우 미국이 입게 될 피해는 구체적이라기보다 추상적이다. 동맹국들이 중국과 더 가까워질 계기를 제공한다든지, 인도·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리더십 약화 같은 것들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당장 트럼프의 국내 정치적 목적을 변경시키기에는 먼 훗날의 일이다.
셋째로, 트럼프는 철저히 양자 협상을 선호하고 다자간 협상을 배격한다. 상대 국가들을 서로 떨어뜨려 놓고 분할 지배해야 전략이 먹히기 때문이다. WTO를 혐오하고 그 배경인 우루과이 라운드 대신 ‘트럼프 라운드’가 시작됐다고 선언하는 것도 다자간 협상 틀을 깨겠다는 뜻이다. 트럼프에게 속수무책 당하고 있는 나라들도 서로 연합해서 공동대응한다면 그의 무리한 요구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모험을 택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 정도이다. 실제로 중국은 지난 4월 미국에 대해 125%까지 보복관세를 부과하며 압박한 끝에 휴전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수출, 안보, 인도·태평양 전략, 북핵 문제까지 겹쳐있는 한국은 이런 전략을 시도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함부로 멀어질 수 없고 중국과 함부로 가까워질 수 없는 상태에서 동시에 일방적 양자 협상 틀에서 벗어나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경력은 거의 국내 정치활동에 국한되어 있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의제들에 얼마나 식견을 가졌는지 검증된 적은 없다. 취임하자마자 불리한 의제들을 가지고 협상의 달인을 상대해야 하는 회담이어서 큰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다만 임기 초반에 살벌하게 격변하는 국제정세의 현실을 그가 가진 특유의 실용정신으로 깊이 새기고 돌아온다면 나름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쟁투의 국내정치에서 눈을 돌려 원대한 세계 무대로 시선을 옮기면 비로소 나라가 나아갈 길이 보일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