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지구를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속담이다.
탄소중립의 사각지대를 메우는 세 번째 영역, 스코프 3(Scope 3)가 글로벌 기후 규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올해부터 시행되는 유럽연합(EU)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은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 공시를 법제화하며, 특히 공급망·제품 사용·폐기 등에서 발생하는 간접 배출까지 보고 대상에 포함시킨다. 단지 보고 의무의 확대가 아니라, 기업 운영 방식 전반의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조용한 혁명이다.
그간 온실가스 감축 규제는 주로 스코프 1(직접 배출)과 스코프 2(구매 전력·열 사용에 따른 간접 배출)를 대상으로 해왔다. 국내는 2015년부터 배출권거래제(K-ETS)가 본격 시행되며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이 일정 기준 이상인 기업(약 700여개)을 대상으로 감축 의무가 부과되고 있다. 화력발전소,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등 에너지 다소비 업종이 중심이며, 기업들은 할당된 배출권 범위 내에서 스코프 1과 스코프 2를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기업들의 전체 배출량 중 스코프 3가 60~80%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제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원자재 채굴, 공급망 운송, 소비 후 폐기 등 가치사슬 전반에서 발생하는 '보이지 않는 탄소'는 배출권거래제의 범위 밖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국제기준은 '외부 배출' 측정·감축을 기업 책임으로 본다.
이미 글로벌 선도기업들은 스코프 3 감축을 공급망 계약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 애플은 2030년까지 협력사에 탄소중립 이행을 요구하고 있으며, ASML은 반도체 부품 공급망과 장비 운용 전주기에 걸쳐 스코프 3 감축계획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내 기업에도 즉각 영향을 미친다. 단순한 보고의 문제가 아니라, 거래를 지속하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주목받는 것이 사용후 폐전자장비에서의 자원 회수와 재활용이다. 프랑스의 언론인 기욤 피트롱은 그의 저서 '프로메테우스의 금속'에서, 친환경 기술로 분류되는 태양광, 배터리, 반도체, 정보통신(ICT) 장비가 사실상 희소금속에 대한 새로운 식민주의를 낳고 있다고 비판한다. 전기차 1대당 희소금속 사용량은 리튬 약 10㎏, 코발트 약 10~15㎏, 니켈 약 30㎏ 이상으로 막대한 양이 필요하다. 내연기관차 광물 소비량이 대비 6배 이상이다. 풍력터빈 1기당 네오디뮴·디스프로슘등 희토류만 약 200㎏ 이상이고 스마트폰 1대에 포함된 희소금속은 평균적으로 40~50가지다. 전자정보통신제품 전체로 보면 엄청난 물량이 필요하다.
한국은 전자제품 생산 3위 국가로서 막대한 핵심광물 수요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그만큼 탄소중립을 위한 기술 전환이 곧 국가 자원안보의 리스크로 직결될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해법은 신재료의 수입은 줄이고 자원 재순환을 최대한 확대하는 것이다. 정부도 핵심광물확보전략을 세우고 현재 2% 수준인 재자원화율을 2030년까지 20%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사업장과 가정에서 연간 80만톤이 넘는 버려지는 사용후 전자장비에서 리튬, 코발트, 희토류 등을 회수해 재활용하면, 신규 채굴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최대 80%까지 줄일 수 있다. 자원 순환은 탄소 감축뿐 아니라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고, EU 등 국제규제 대응과 고객에 대한 이미지 개선에도 유효하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스코프쓰리협회는 스코프 3에 특화된 탄소배출량 인증 체계, 재활용 인증, 제품 전과정평가(LCA) 지원 등 공급망 저탄소화를 위한 핵심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2023년 이후 이미 250여 개 기업이 폐전자제품 재활용으로 인한 탄소배출감축효과에 관한 스코프 3 검인증을 해왔고 이는 곧 전자업계 등의 글로벌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쟁력의 지표가 되어가고 있다.
폐전자제품은 가정에서 많이 나오지만, 사업장에서 배출되는 물량도 적지 않다. PC, 모니터, 냉장고, 냉온수기 뿐 아니라 서버, 통신장비 등 재활용가치가 매우 높은 기기들이 사업장에서 배출되고 있고,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자스크랩의 자원순환성 제고도 요구된다. 이제 탄소중립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기업의 총체적 운영방식과 철학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전환은 자원 회수, 순환, 공유라는 가치 위에서만 지속가능할 수 있다.
송효택 한국스코프쓰리협회 부회장 htsong1@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