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9일(현지시각)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중국 수출을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수출을 하려면 정부 당국의 허가를 받으라는 조건이었다. 만들어진 반도체의 수출을 제한하는 수준을 넘어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소프트웨어까지 규제하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미국의 반도체용 전자 설계 자동화(EDA) 소프트웨어 개발사인 시높시스와 케이던스는 “(상무부로부터) 수출 제한 조치를 통보받았다”고 전했다. 또다른 EDA 개발사 지멘스 EDA의 중국 사이트는 상무부의 발표 당일 차단됐다.
이날 소식을 보도한 로이터는 중국의 반도체 기업이 미국 EDA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며, 이번 수출 규제가 업계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이 EDA를 반도체 전쟁의 전략 무기처럼 활용한 셈이다. EDA가 뭐길래 미중 무역전쟁의 품목이 된 것일까.
반도체 생산 필수 도구 ‘EDA’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는 반도체 설계부터 검증에 걸쳐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다. 반도체를 설계하면서 성능, 전력 소비량, 칩 면적 등 다양한 요소를 자동으로 최적화한다. 이 요소들의 균형을 맞추고 요구 사양에 적합한 설계 방법을 찾아내는 게 EDA의 주요 역할이다.
반도체 산업 초창기에는 종이에 펜으로 회로를 그렸다. 트랜지스터, 배선 등도 투명 필름에 그려 레이어를 만들었다. 1950~1960년대의 반도체는 지금과 같이 나노 단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반도체에 점차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탑재하고 회로가 복잡해지면서 수작업 설계는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또 수작업은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고 수정도 어려웠다.
1980년대 초에 EDA가 등장하면서 반도체 설계에서 수작업은 사라졌다. EDA는 복잡한 설계를 자동으로 수행함으로써 설계 시간 단축에 큰 힘을 보탰다. 현 반도체 생산 시장에서 EDA는 ‘필수 도구’나 다름없다.
EDA는 설계에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는 역할도 겸한다. 제조를 시작한 뒤에야 오류를 발견하면 이미 생산한 반도체를 폐기하고 공정을 수정하는 등 큰 손실로 이어진다. EDA는 설계 과정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한 검증을 시행, 발생할지 모를 오류를 찾아낸다.
美 3사가 장악한 EDA 시장
일본 시장조사기관 글로벌인포메이션은 2024년 세계 EDA 시장 규모를 125억달러(약 17조163억원)로 추정했으며, 2033년에는 208억달러(약 28조3150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시장은 현재 미국 기업 세 곳이 독점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시높시스, 케이던스, 그리고 지멘스 EDA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4년 EDA 시장 점유율은 시높시스(31%), 케이던스(30%), 지멘스 EDA(13%) 순이다.
범위를 중국으로 좁혀도 점유율은 비슷하다. 트렌드포스 조사 결과 미 3사는 2024년 중국 EDA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했으며 중국 기업의 점유율은 10%대 초반에 그쳤다.
중국에도 임피리언, 프리마리우스, 세미트로닉스 등 EDA를 개발하는 기업이 많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중국의 EDA가 일부 공정에만 특화되거나 첨단 GAA(Gate-All-Around) 분야에 부적합하다며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미국은 2022년 8월 3nm(나노미터) 이하 첨단 초미세공정에 필요한 EDA 소프트웨어의 중국 수출을 금지한 바 있다. 이번 조치를 통해 규제 대상을 7nm 노드까지 넓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수출 규제로 브라이트세미컨덕터, 주하이제리, 베리실리콘을 비롯해 미국 EDA를 사용하는 중국 기업의 반도체 설계와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전망이다.
이런 조치가 오히려 중국 기업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왔다. 트렌드포스는 미국의 대중 규제가 강화됨에 따라 중국 정부와 민간이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며, 중국의 EDA 소프트웨어 자급률이 점차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2023년 화웨이는 중국 내 EDA 개발사와 협력해 14nm 이상 공정에 사용할 수 있는 EDA를 만든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은 최첨단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뒤처진 만큼 최신 도구와 노하우가 부족하므로 안정적인 EDA를 개발하기는 어렵다고 트렌드포스는 덧붙였다.
한국에도 EDA 개발 기업이 있다
국내에서도 EDA를 개발하는 기업은 몇 군데 있다. EDA를 전문으로 개발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팹리스 기업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기반으로 EDA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들은 미 3사처럼 반도체 설계 공정 전반에 걸친 자동화 기능을 제공하기보다는 일부 공정에 특화한 솔루션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EDA 개발사 바움디자인시스템즈는 반도체의 전력 소모량을 분석·최적화하는 ‘파워 바움’을 2017년, 게이트 단의 전력 소모량 분석 엔진 ‘파워 워젤’을 2018년 출시했다. AI 반도체 팹리스 기업 소테리아는 자체 칩 개발 과정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활용, 지난 3월 EDA 소프트웨어 ‘DEF 지니’를 개발했다. 반도체의 복잡한 계층 구조를 분석해 보다 간단한 구조로 변환하는 과정을 자동화한다.
아쉽게도 국내 기업의 EDA 소프트웨어를 찾는 반도체 설계회사는 아직 많지 않다. 미 3사가 수십 년의 노하우와 기술을 기반으로 신뢰를 얻고 지속적인 지원을 제공하는데, 이를 마다하고 신생 기업을 선택할 반도체 기업을 찾기란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간 미 3사가 유망한 EDA 기술 보유 기업을 수백 차례나 인수합병한 점에 기대,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해 인수되길 기대하는 편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다.
인력 양성과 유출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EDA 도구 개발에는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뿐만 아니라 반도체 공정과 설계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필수 불가결하다. 업계에서는 이 조건을 충족하는 인재가 있더라도 해외 기업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영입하다 보니 국내 기업이 개발 수준을 높이기 어렵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이병찬 기자>bqudcks@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