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인 어릴 땐 어땠을까...첫 자전 에세이 ‘눈물꽃 소년’ [BOOK]

2024-02-23

눈물꽃 소년

박노해 지음

느린걸음

"평아, 사람이 말이다. 할 말 다하고 사는 거 아니란다. 억울함도 분함도 좀 남겨두는 거제. 잘한 일도 선한 일도 다 인정받길 바라믄 안 되제. 하늘이 하실 일도 남겨두는 것이제."

새들이 알곡을 쪼아먹지 못하도록 온종일 대나무 장대를 들고 보초를 선 아들에게 엄마는 말한다. "새들도 좀 묵어야 사니께 곡식은 좀 남겨두는 것"이라고. 그 후로 소년은 감을 딸 때도 맨 꼭대기에 달린 감들은 남겨뒀다. 옆집 담장을 넘어간 감도 그대로 뒀다.

박노해 시인의 첫 자전 수필 『눈물꽃 소년』에는 그런 어린 시절이 담겼다. 남도의 작은 마을 동강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본명 박기평의 마지막 글자를 딴 이름 '평이'로 불리던 시절이다.

평이는 몸살을 앓는 정미소댁을 위해 할머니가 만든 낙지탕을 이고 지고 배달을 간다. 또 샘터 옆 새댁이 첫 아이를 낳고 젖이 안 나와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애저탕을 만들어 평이에게 맡긴다. 하루 종일 배달을 다닌 손자를 평상에 앉힌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손발 좀 아낀다고 금손 되겄냐 옥손 되겄냐. 좋을 때 안 쓰면 사람 베린다. 다 덕분에, 덕분에 살아가는 것잉께."

책을 펼치면 가을 흰 서리가 내린 아침, 해당화 향기가 가득한 황톳길, 연노랑 벼가 일렁이는 논둑 등 박노해를 키운 풍경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평이를 사랑으로 키워낸 것은 할머니와 '엄니' 뿐만이 아니다. 건넛집 아재와, 얼굴 가득 수염을 기른 호세 신부님, 아랫집 점이 누나와 도강생을 품어준 훈장 선생님까지. 온 마을이 한 아이를 길러내는 모습이 마음 한구석을 데운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내가 커 나온 시대는 어두웠고 가난했고 슬픔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은 "결여와 정적과 어둠이 하나의 축복"이 된 시절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너무 빨리 잃어버린 원형의 것들이, 인간성의 순수가, 이토록 순정하고 기품 있는 흙가슴의 사람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 있었다"며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가슴 시린 나의 풍경이었다"며 그때를 그리워했다.

33편의 글마다 수록된 삽화는 박노해 시인이 직접 연필로 그렸다. 진한 남도 사투리에는 그 시절 후덕했던 이웃 간의 정이 진하게 녹아있다. 작은 평이가 펼쳐내는 담백한 이야기가 다독다독 등을 쓸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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