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병들어 가라앉고 있다. 양적으로 성장이 멈춰 있는 것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징후가 동시다발로 확인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위기를 진단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저출생과 고령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 국가 같은 문제도 결국 건강하지 못한 사회를 오래도록 방치한 결과다. 유아단계부터 청년, 노후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 주기에 있어서 국민이 불행해지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지표가 쉬지 않고 새롭게 등장한다.
아이들은 점점 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높은 교육열이 한국의 고도성장에 중요한 기반이 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대입을 위한 사교육은 선을 넘어 멈출 줄 모른다.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한 ‘7세 고시’와 더 좋은 영아 유치원에 가기 위한 ‘4세 고시’ 같은 용어가 등장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초등학교 2~3학년쯤 돼서 수학 선행에 뛰어들 준비가 된 아이라면 ‘생각하는 황소’ 수학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황소 고시’도 필수로 준비해야 한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선행 학습에 내몰리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사교육을 받을 기회가 부모의 경제력에 좌우되는 현실은 기회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지난해 초중고 사교육비는 29조2000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고, 3조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영유아 사교육비 등을 감안하면 전체 사교육비 규모는 연간 30조원을 훌쩍 넘긴다. 영유아 시절부터 선행학습을 시작하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출발점이 과연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성인이 된다고 해서 밝은 미래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지난 2월 기준 청년층(15∼29세) ‘쉬었음’ 인구가 처음으로 50만명을 넘어섰다. ‘쉬었음’ 인구는 취업준비나 학업 등을 전혀 하지 않고 그야말로 ‘그냥 쉬었다’고 응답한 사람을 뜻한다. 무엇보다 청년층의 눈높이에 맞는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탓이 크다.
대부분 임금과 일자리 안정성이 높은 대기업 취업을 원하지만 문이 좁고, 눈높이를 낮춰 취직했다가 좋은 일자리로 이직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고민 등이 반영됐다. 이렇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상태로 청년 시기를 보낼 경우,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사회적 고립에 따른 심리적 문제까지 심각해질 수 있다.
노년에도 불안하긴 매한가지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2023년 상대적 빈곤율(노인빈곤율)은 38.2%에 달한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이 전체 중위소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노인들이 40%에 육박한다는 뜻이다.
이는 곧 늙어서도 생계를 위해 일을 계속해야 하는 노인들이 다수라는 의미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급속하게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연금개혁이나 정년 연장 등의 구조개혁이 불가피한데 이때마다 청년과 노인 사이의 세대갈등도 극심할 것이 뻔하다.
이런 통계를 조합해보면, 한국 사회에서 ‘괜찮은 삶’을 산다는 것이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급기야 국민 절반 이상이 ‘장기적 울분 상태’에 있다는 조사 결과까지 나왔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육연구단이 조사한 결과 한국 사회의 정신건강이 ‘좋지 않다’고 답한 비율이 48.1%였는데, 그 이유로는 ‘경쟁과 성과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를 가장 많이 꼽았다. 또 응답자의 54.9%는 울분 상태가 지속되는 ‘장기적 울분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주관적으로 자신을 ‘하층’으로 인식하는 집단에서는 심한 울분 비율이 16.5%로 가장 높았고, ‘중간층’으로 인식하는 집단에서 9.2%로 가장 낮았다.
정치의 계절이다. 지난해 불법계엄 이후 연일 판을 키우는 역대급 막장 드라마에, 정치는 가장 인기 있는 대국민 엔터테인먼트가 된 듯하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은 집권세력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높다는 뜻이고, 동시에 현재에 대한 불만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대선에서도 민생을 살리겠다며 각종 공약들이 쏟아질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 방치해 온 구조적 질환을 고치는 일이다. 양극화와 각자도생으로 치닫는 ‘울분 사회’에 제동을 걸지 못하면 한국에 미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