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업의 끝

2024-10-17

일본에 ‘형제는 남의 시작’이라는 속담이 있다. 국내 재계 70년사(史)에 비춰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창업주가 남긴 기업의 경영권을 놓고 벌인 ‘형제의 난’은 드문 일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벼랑 끝 대결을 한 적도 있다. 모녀와 아들들이 각각 손잡고 상대방을 겨누기도 한다.

하물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동업(同業)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산 17조원, 재계 25위권 영풍그룹의 3대(代)에 걸친 장씨·최씨 간 동업이 ‘공식적으로’ 깨질 판이다.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뛰어들어 5조~6조원대 ‘쩐의 전쟁’을 벌이면서 판이 커졌다. 고려아연 공개매수에서 5.34%를 확보, 45% 안팎의 의결권을 갖게 된 영풍·MBK 연합은 조만간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하고 이사진 교체를 시도할 것으로 관측된다. 국민연금(지분 7.83%)의 향방, 소송 공방, 금융감독원 조사 등 변수가 남았지만 75년 동업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다. ‘형제의 난’ ‘모자 대결’에 이어 굵직한 ‘동업자의 난’이 추가되는 셈이다.

고려아연 경영권 ‘쩐의 전쟁’은

누가 이겨도 이기지 못하는 싸움

결별 대비한 구체적 준비도 필요

이제 두 집안(또는 기업)이 호흡을 맞추는 ‘2인3각 경영’이 유지되는 대기업 사례는 미국 쉐브론과 합작한 GS칼텍스, 고(故) 유성연·이장균 명예회장이 세운 에너지 기업 삼천리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한화와 DL이 똑같은 지분으로 손잡은 여천NCC, 효성과 코오롱이 1·2대 주주로 참여했던 카프로, 네이버와 일본 소프트뱅크가 공동 투자한 라인야후(A홀딩스) 등이 하나같이 갈등을 겪었다.

그만큼 동업이 힘들다. 2008년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선) 인수전 때 일화다. 포스코와 GS가 50대 50 지분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한다고 발표하자 경쟁자였던 김승연 한화 회장은 “승기를 잡았다”며 임직원을 독려했다고 한다. 한화 관계자가 전한 김 회장의 단언이다. “머리가 크고, 컬러(기업문화)가 다른 기업이 공동 경영을 하는 건 한국적 풍토에서 불가능하다.”

이질적인 컬러도 컬러지만, 현실적으로 동업이 깨지는 이유는 경영 승계 때문이다. “지분과 ‘왕관’(경영권)을 자식에게 물려줘야 ‘온전히 내 것’이 된다고 여기는 생각”(김우진 서울대 교수)이다. 여기에 사모펀드가 참전하면서 방정식이 복잡해졌다. 지분율이 희석된 3·4세대 기업이 먹잇감으로 올라온다. 재계는 기업을 지키는 방어수단으로 차등 의결권, 포이즌필(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 시 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한 권리) 도입을 주장한다. 자금 동원력에서 최고수인 사모펀드에 맞설 방법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처럼 자사주 매입 말고는 마땅히 없다면서다. 하지만 “재벌 보호”라며 여론은 싸늘하다.

어떻게 시작됐든 고려아연 분쟁은 ‘상대방은 절대 안 된다’는 감정싸움이 돼 버렸다.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은 세계 1위 비철금속 회사를 최씨 집안에 넘겨줄 수 없다는 생각인 듯하다. MBK는 1조8000억원을 차입으로 당겼다. “중국 자본에 회사를 팔면 한국 기간산업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고려아연 경영진은 “영풍·MBK가 회사를 인수하면 전원 사표를 내겠다”며 배수진을 친 상태다. 최 회장 측은 “자사주 매입은 기업 가치 하락”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다. 돈도 다 걸었고, 소송전도 첩첩이다. 누가 이겨도 ‘이긴 게 아닌’ 싸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호 세력을 포함해 각각 30%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장기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안타까운 동업의 끝이다.

적대적 M&A에 노출되지 않는 원론적 방법은 기업이 스스로 가치를 키우고,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지분 1.85%를 갖고 이번 분쟁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영풍정밀의 시가총액이 지난달까지 1000억원대였다”며 “이렇게 주가가 방치된 회사가 증권 시장에 수두룩하다. 지배구조 개선 목소리가 큰 이유”라고 말했다. 두 회사야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지만, ‘기업 이혼’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도 필요하다. 동업은 좋은 시절만 있는 게 아니다. 냉정해 보이지만 상황 변화에 합리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미국 할리우드 배우들이 결별할 때 어떤 식으로 재산을 나누겠다며 작성하는 합의문이 벤치마크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더. 삼천리는 2세 이만득·유상덕 회장 일가가 지분을 절반씩 보유하고 있다. 서로 주식을 반반으로 나누다가 딱 한 주가 남자 시장에 매각했던 이력도 있다. “당연한 동업 원칙”이라면서다. 고 유성연 공동 창업주가 남긴 말이다. “동업을 하려면 자본금을 60대 40으로 냈더라도 이익은 50대 50으로 나눌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 이미 헤어질 결심을 한 마당에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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