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우리는 같은 지역에 살고 글을 쓰며, 강아지와 메리 올리버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친구가 내게 보낸 첫 번째 메일에는 메리 올리버의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메일을 읽으며 친구가 시를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친구는 눈이 아닌 손끝으로 글을 읽는다. 여섯 개의 작은 점을 만져 문자를 식별한다. 메리 올리버의 ‘어둠이 짙어져가는 날들에 쓴 시’도 그렇게 읽었을 것이다. 언젠가 친구가 점자 키보드를 보여준 적이 있다. 간단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내 눈에는 그저 마법처럼 보였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키보드에서 글자가 튀어나오고, 손바닥에 작은 등불이 켜져 글자가 환해지는 마법.
요즘 나는 친구를 통해 한 번도 본 적 없던 세계를 발견한다. 그것은 메리 올리버의 시를 읽는 경험과 닮았다. 나는 그 시를 통해 누구나 자기만의 어둠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는 빛을 좇는 게 아니라, 스스로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때때로 친구의 어둠을 함께 걸어보고 싶다. 그래서 그가 쓴 책을 펼치고, 친구와 나란히 그의 세계를 거닐어보는 상상을 한다. 상상 속에는 무지개다리를 건넌, 친구의 시각장애인 안내견이 함께 있다. 친구의 글 덕분에 나는 만난 적 없는 그 강아지를 보고 만진다. 그러다 책을 덮으면, 문득 친구에게 전화해 나의 세계에 그를 초대하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늦여름에서 가을로 향하는 이 계절, 만경강 둑길을 함께 걷자고 하면 어떨까. 태양이 기울 때, 내가 사는 이 작은 마을이 얼마나 붉게 물드는지 보여주고 싶다. 또 내 강아지가 그 일몰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붉은빛을 보지 못하는 개가 저무는 해의 찬란함을 어떻게 알아채는지 말해주고 싶다. 어둠이 찾아오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커지면, 내가 보고 말하고 쓰는 모든 게 얼마나 불완전하고 하찮은지 깨닫게 된다고 고백하고 싶다. 그래서 내 눈에 담긴 세상과 강아지가 코끝으로 발견하는 세상, 친구가 손끝으로 읽어내는 세계를 연결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함께 걷는 상상을 하면, 이 마을이 여섯 개의 점으로 된 얼굴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내 삶의 방식과 경험으로는 볼 수 없는 그 얼굴을 친구의 손가락이 읽어줄 수 있지 않을까.
본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고 믿지만, 그것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보는 행위는 언제나 타인과의 만남, 사회적 맥락과의 교차 속에서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만남이란 서로의 시선이 포개지는 사건이 아니던가. 그러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것도 온전히 내 것일 리 없다. 마을의 역사와 오래된 이야기, 어둠을 노래한 메리 올리버, 온몸으로 세상을 느끼는 강아지의 몸짓이 합쳐져 나타나는 풍경일 것이다.
점자는 여섯 개의 점으로 이뤄진다. 그 작은 점들을 만져 글자를 읽고, 이어서 문장을 이해한다. 점과 점이 이어질 때 언어가 되고, 세계가 드러난다. 장소도 그렇다. 우리가 각자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조각들은 불완전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이어질 때 하나의 얼굴을 갖는다. 나만의 것도, 당신만의 것도 아닌, 서로 다른 점들이 만나서 비로소 드러나는 형상. 그것이 장소의 얼굴이고, 만남의 풍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