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나는 여전히 치과의사이지만, 한 손에는 익숙한 핸드피스가 아닌 마우스를, 다른 손에는 밀링머신에서 갓 나온 크라운을 들고 있었다. ‘어쩌다 치과의사인 내가 이렇게 디지털을 공부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 글의 제목, ‘어쩌다 디지털’은 인기 TV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의 축구팀 어쩌다FC에서 착안했다. 한때 최고의 운동선수였던 이들이 은퇴 후 축구를 배우며 엉뚱한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에서 웃음과 공감을 얻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이들이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당혹감과 도전이, 디지털 덴티스트리를 배우며 겪는 우리 치과의사들의 상황과 묘하게 닮아 있다고 느꼈다.
디지털 기술은 치과에 혁신을 가져왔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본을 뜨고, 석고 모델을 만들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치료를 했다. 그때는 최상의 진료를 제공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디지털은 치과의 모든 분야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주류가 되어버렸다. 이제 학회에서도, 논문에서도, 환자 상담에서도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한때 아날로그 방식에 능숙했던 뭉쳐야 찬다의 출연진처럼, 낯선 디지털 환경에서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때로는 무거운 어깨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다 디지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할까? 나는 세 가지 키워드로 이 여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디지털을 시작하는 법
치과대학 시절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처음 치의학을 접하면서 치아와 구강의 명칭과 구조, 즉 여러 용어(terminology)를 배웠던 기억이 있다. 같은 이치이다. 디지털 덴티스트리를 배우기 위해서도 새로운 용어와 개념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STL이라는 파일 형식은 디지털 치과에서 필수적인 개념이다. Standard Tessellation Language의 약자인 이 파일(STL)은, 표면을 작은 삼각형 메쉬(Mesh)로 나누어 3D 모델을 생성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이를 이해하면 디지털 스캔 데이터를 다루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된다. 메쉬 구조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인 버텍스(Vertex), 엣지(Edge), 페이스(Face)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치아의 명칭과 해부학적 구조를 배우듯, 디지털 덴티스트리의 기초를 탄탄히 쌓는 시작은 용어 정리에서 시작되기를 권한다.
2. 디지털을 즐기는 법
디지털 덴티스트리를 배우는 과정은 어렵지만, 그 속에서도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치과를 처음 공부할 때도 낯선 개념들 속에서 보람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학회에서는 기공사, 연구자, 임상 치과의사를 위한 정보가 뒤섞여 있어 과부하가 걸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실제 임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기술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디지털을 일상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접하면 더 쉽게 익숙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Thingiverse.com 같은 사이트에서는 3D 프린터를 활용한 다양한 오픈소스 디자인을 공유하는데, 이를 활용하면 치과 모델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3D 프린팅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다.
3. 디지털의 미래를 준비하는 법
디지털 덴티스트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현재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분야는 AI(인공지능)이다. AI는 이제 충치를 자동으로 탐지하고, 임플란트 플래닝을 돕고, 맞춤형 보철물을 디자인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과거에는 숙련된 기공사가 해야 했던 일들이 AI와 CAD 소프트웨어를 통해 자동화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AI를 적대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를 활용하는 ‘AI 어시스티드 덴티스트리(AI-Assisted Dentistry)’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치과 교육에서도 AR(증강현실)과 VR(가상현실)을 활용한 새로운 학습 방식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가 치과대학 시절 석고를 깎으며 배웠다면, 이제는 3D 가상 환경에서 치아 해부학을 학습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결론 - ‘어쩌면 디지털’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쩌다 우리는 디지털을 배우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쩌면 이 디지털 기술이 치과 진료의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 줄지도 모른다. 처음 치과대학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려 보자. 낯설었던 치의학이 어느새 우리의 일부가 되었듯, 디지털도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다 디지털을 만났지만, 이제는 어쩌면 디지털이 우리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