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폭동 의미 새기고 행동해야 한인사회 성장
고 민병수 변호사 아내 캐롤 민 여사 회고

많은 한인 상점이 약탈당할 때
그날 경찰 어디 있었는지 의문
한인사회 폭동 상처 딛고 성장
젊은 세대 협력 분위기 강해져
33년 전 오늘, LA시를 휩쓴 폭동은 한인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수많은 한인 상점이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보호를 요청하는 한인들의 외침에도 경찰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인들은 고립된 채 홀로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단, 절망 속에서도 한인 사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LA폭동은 오히려 한인 사회의 단결과 성장을 이끌어낸 전환점이 됐다. 4·29 폭동 33주년을 맞아 당시 한인 사회를 위해 누구보다 헌신했던 고 민병수 변호사의 아내, 캐롤 민 여사를 만나 그날의 기억과 이후 변화한 한인 사회의 모습을 들어봤다.
지난 1992년 4월 29일, 민 여사는 TV 뉴스를 통해 폭동 소식을 처음 접했다. 당시 그는 한인타운에서 약 3마일 떨어진 파크 라브레아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긴박한 뉴스를 본 민 여사는 곧장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한인타운 쪽을 바라봤다.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민 여사는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며 “살면서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폭동이 더 큰 규모로 번지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덧붙였다.
민 여사는 남편 민 변호사와 함께 급박하게 돌아가는 한인 사회의 상황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민 변호사는 즉시 11명의 변호사와 함께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KABA) 산하에 법률 지원 조직을 결성하고 절도, 화재, 파손 등 각종 피해를 본 한인 업주들을 지원했다.
민 여사는 “당시 많은 한인 업주가 가게가 불타거나 약탈당하는 상황에서도 경찰을 기다렸지만, 끝내 그들은 오지 않았다”며 “지금도 경찰들이 그날 어디에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폭동 당시 민 변호사는 집에 머무는 날보다 한인 사회 복구를 위해 밖을 뛰어다니는 날이 더 많았다.
민 여사는 “남편이 집에 온 날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며 “동료 변호사들과 피해 복구 방안을 논의하고, 직접 피해 현장을 발로 뛰며 꼼꼼히 확인했다”고 말했다.
민 여사는 늘 일에 매달리던 민 변호사가 자녀들에게 미안해했다고 했다.
그는 “남편이 늘 바쁘다 보니 두 아들과 보내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며 “아이 중 한 명은 ‘아빠가 나랑 시간을 더 보내주면 좋겠는데, 또 일하러 가버렸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민 여사 부부는 한인들이 무고한 피해자가 되었음에도, 주류 언론이 한인 사회를 폭동 발발의 원인처럼 몰아간 현실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
민 여사는 “한인 사회는 폭동의 원인도, 문제의 당사자도 아니었는데 부당한 공격을 받았다”며 “한인 사회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한인타운이 불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흑인 사회가 자신들의 분노를 아무 관련 없는 한인들에게 폭력으로 표출한 것은 비합리적이었다”고 비판했다.
참혹했던 기억에도 불구하고, 민 여사는 4·29 폭동이 한인 사회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는 “폭동 이후 한인들이 한인타운을 떠나면서 구심점은 약해졌지만, 한인 사회의 정치력과 경제력은 눈부시게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인 출신 판사, 정치인, 고위 공직자들이 늘어난 것은 한인 사회 전체에 큰 동기부여가 됐다”고 평가했다.
또한 민 여사는 차세대 한인들의 협력과 연대 의식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과거에는 분열과 이권 다툼이 많았지만, 지금은 젊은 세대가 서로 돕고 협력하려는 분위기가 훨씬 강해졌다”며 “한인 사회가 한층 더 성숙해졌다”고 말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LA폭동의 의미와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했다.
민 여사는 “LA폭동은 한인 사회가 상처를 딛고 성장한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역사”라며 “한인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LA폭동은 반드시 기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