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흠모해 왔다. 한글을 뗀 것도, 이야기 테이프를 듣고 듣고 또 듣다가 얻어낸 부산물이다. 어떤 이야기는 읽은 즉시 잊혔으나, 어떤 이야기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도대체 왜, 특정한 이야기는 개인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하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수십·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불멸의 삶을 사는 걸까?
전혜정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웹소설 창작전공 교수는 근저 <살아남는 스토리는 무엇이 다른가>에서, 오랫동안 독자의 머릿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이야기의 법칙을 말한다. 인간의 본능을 사로잡는 세계관과 캐릭터, 플롯의 원칙이다. 그간, “와 이 얘기 끝내주게 재미있다”라고만 생각했던 그 소설이, 사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전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했다. 2부는,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기 위한 인물과 그 인물의 말, 행동궤적이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다룬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야기는 “세계관의 당위성을 결핍한 주인공이, 결핍을 해소하겠다는 동기를 갖고 세계관의 규칙대로 움직여서, 세계관 속에 숨겨진 메시지를 깨닫고 자신의 결핍도 해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는 메커니즘을 여러 이해하기 쉬운 예와 함께 소개한다.
3부에서는, 2부에서 쌓아 올린 매력적 인물을 데리고 어떠한 플롯을 짜야 하는지 소개한다. 독자의 멱살을 잡고 엔딩까지 한 방에 가려면, 어떻게 주인공만을 위한 길을 깔아야 하는지, 그리고 ‘세계관-인물-플롯’을 설계하는 6단계 구조는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또, 지금까지 사랑받고 살아남은 플롯의 6가지 원형에 대해 말한다.

지금까지 소개만 보면 작법서 같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본 이유는 책의 초반부인 1부의 덕이 조금 더 크다. ‘인간은 왜 이야기를 사랑하는가’를 넘어, ‘인간에게는 왜 이야기가 필요한가’부터 돌아본다. 작가는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보다 근본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말한다. 나도, 내가 왜 이야기에 환장을 해왔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했다.
실제로 이 책은 ‘이야기’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써낸 인문서이기도 하다. 미래의 작가가 되겠다는 독자를 상대로 좋은 스토리를 쓰는 법을 알려주는 책인 줄 알았는데, 이 책 자체를 읽는 것만으로도 얻을 지식과 교양이 있다. 쉽게 쓰였고 재미가 있으니 술술 읽힌다. 굳이 스토리를 쓰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사람들이 왜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저자와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많이들 무시하는 일명, ‘장르문학’에 대한 헌사도 바친다. 꽤 많은 이들이 “웹소설이나 써보면 어때?”라고,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것처럼 장르문학이나 웹소설을 무시하는데, 그렇지 않다. 작가는 오히려, 역사상 인간이 개연성과 당위성을 획득하기 위해 만들어 왔던 ‘신화’의 적자가, 오히려 장르문학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장르문학의 비슷비슷한 전개가 유치하게 느껴진다고요? 작품마다 결론이 엇비슷해 보인다고요? 바로 그 비슷한 문법이 우리를 안도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누구나 결핍이 있고, 그것을 메우기 위한 행동 규칙을 알고 싶어 하며, 규칙에 따라 살면 보상을 얻는 질서가 통하는 세계에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본능 때문에 인간은 당위성과 개연성이 있는 스토리텔링에 빠져들어 위안과 대리만족을 느끼며 함께 울고 성내고 기뻐합니다. 과학이나 순수문학이 못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죠. 소중한 존재를 잃어서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어떤 생명이든 죽으면 그저 원자로 흩어진다.’라면서 눈치 없이 구는 과학이나, 고된 삶에 지쳐 번아웃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채찍질하면서 굳이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순수문학 대신 쉴 곳이 필요한 인간은 신화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사랑하는 ‘당위의 이야기’가 하는 역할입니다.”
다만, 이 책은 ‘워크북’은 아니다. ‘요렇게, 조렇게 따라 쓰세요’라고 빈 줄 그어 넣고 지금 당작 창작을 시작하라고 권유하진 않는다. 대신 오랜 시간 기억되고 읽힐 스토리를 쓰기 위해 작가가 무엇을 더 생각하고 고민하며 공부해야 하는지를 적절히 알려준다. ‘지금 당장 이런 대사를 써라’고 학습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고민하면 살아 있는 명대사를 쓸 가능성이 생긴다’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예컨대 ‘주인공은 결핍을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는 건 잘 알겠지만, 도대체 이 결핍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도무지 모를 때가 있다. 작가는 ‘더 읽어보기’로, “우리의 주인공에게 무엇이 결핍됐는지, 왜 이런 결핍이 생긴 것인지, 그 결핍이 서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보기 위해 임상심리삭자 제프리 E.영의 스키마 치료이론”을 소개한다. 내 주인공이 어떤 결핍을 겪고 있는 것인지, 그 결핍의 도메인을 작가가 정확히 안다면 그에 걸맞는 서사를 써내려갈 수 있다.
책을 집필한 작가 전혜정도, 그 자신이 ‘살아남는 스토리’를 쓰고 있다. 표지 안쪽에 적힌 작가소개를 옮기자면, 전혜정은 어릴 때부터 게임을 좋아하는 오타쿠다. 강원도 삼척 시골에서 나고 자라 만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고2대 미대 진학을 결심, 실제로 시각디자인과 영상디자인을 전공하게 됐고 석·박사까지 마쳤다.
취업 대신 스토리 창작을 시작했고, 스토리텔링 회사를 차렸으며 SF단편영화 ‘아톰팩스’와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로봇트레인’의 제작과 시나리오 집필에 참여했다. 웹툰 <세이브> 등 다수 웹툰의 시나리오를 썼고, 요즘 이 업계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 웹소설창작과를, 무려 ‘창과’했다. 지금은 학교에서 ‘글 써서 먹고 사는 프로작가’를 양성하느라 바쁘다.
<살아남는 스토리는 무엇이 다른가>, 전혜정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25년 5월 7일 발간, 319p, 1만8000원.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남혜현 기자> smilla@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