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을 촉촉하게 하는 다정

2025-05-05

무르익다, 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주로 곡식이나 과일이 충분히 익었을 때 쓰는 말이지만 인격적·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릇 그 존재가 무르익은 사람은 그가 하는 말과 행위가 어긋나지 않고 일치합니다. 어떤 진리를 깨달았을 때도 마찬가지. 깨달음을 통해 자기 존재가 자비로운 우주의 일부임을 알게 된 사람은 그런 깨달음의 희열을 홀로 누리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가 자비를 실천합니다.

사막처럼 정이 메마른 시절

지순한 다정이 공감의 바탕

공감 능력 있어야 세상 밝아져

『연금술사』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가 소개하는 영적으로 무르익은 한 선사의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일본의 한 선사가 있었는데, 그는 그 경전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간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번역을 다 해놓고도 출간할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필요한 경비를 모으는 데만 꼬박 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나라에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선사는 출판을 위해 애써 모은 돈을 전염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다 써버렸습니다.

선사는 다시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또 십 년 세월이 흐른 후 책을 인쇄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도처에 생겨났습니다. 그는 집 잃은 사람들이 다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애써 모은 돈을 모두 기부했습니다.

그 후 선사는 다시 십 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해 다시 돈을 모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간절히 소원했던 『도덕경』을 출간할 수 있었고, 일본인들은 선사의 공덕으로 그 지혜의 고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코엘료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선사는 『도덕경』 세 권을 펴냈다고 말합니다. 두 권은 보이지 않는 책이고 한 권은 보이는 책이라는 것. 무슨 말일까요. 보이는 책 『도덕경』도 소중하지만 자비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책도 말할 수 없이 소중하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 서가에는 보이는 책 말고 보이지 않는 책이 몇 권이나 꽂혀 있는가?’

기왕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요즘 관심을 기울여 읽는 중국 고전에 나오는 시인 한 분의 선행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중국의 대문호이자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인 소동파! 시서화에 능했던 그는 고통스럽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으나 정작 그 자신은 주위를 즐겁게 하는 낙천가이자 기개가 높은 대장부였습니다.

소동파는 나랏일을 맡아 바른 소리를 했다가 모함을 당해 억울한 유배 생활도 했습니다. 그는 어느 해 남방의 유배지에서 풀려나 돌아온 후 양선이라는 곳에 거주하려고 했습니다.

유배는 풀렸지만 그는 여전히 죄명을 벗지 못했고 주머니에는 집을 구할 돈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 지역의 친구 하나가 여러모로 수소문을 해서 집을 구하고 집 살 돈을 빌려주어 겨우 집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새집으로 이사를 가기 며칠 전 소동파는 산책을 하다가 길가의 어느 집에서 늙은 부인의 애절한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늙은 부인은 바로 소동파가 구입한 집의 본래 주인이었는데 불효자인 아들이 대대로 내려온 집을 몰래 팔아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거처를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인에게 이런 딱한 사정을 들은 소동파는 집 계약서를 가져와 즉석에서 불태워 버린 후 아들을 불러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지불한 집값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도덕경 세 권을 펴낸 선사나 대문호인 소동파나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참으로 극진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 사막처럼 메마른 시절, 이런 지순한 다정(多情)이 우리의 삶을 촉촉하게 하고 넉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정은 공감의 바탕입니다. 우리에게 공감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캄캄한 밤과 같아서 타인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공감, 그것은 ‘피아노와 손의 관계처럼 마음이 마음을 건드리는 하나의 음악’(이어령)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 주위의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을 수 있다면 그 사랑과 기쁨의 파동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음악이 되지 않을까요!

고진하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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