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적으로 인생을 길게 놓고 보면 결혼, 전세, 내 집 마련, 자녀 교육, 은퇴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이 모든 생애 이벤트를 함께 준비하지 않는다. “그때 가서 돈 구하면 되겠지”라는 태도가 퇴직연금을 망가뜨린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퇴직연금을 연금 형태로 수령하는 계좌는 전체의 13%에 그친다. 금액 기준으로는 57%가 연금으로 지급되지만 이는 평균보다 큰 자산을 보유한 일부 가입자가 세제 혜택을 노린 결과다. 다수의 가입자는 여전히 일시금을 선택한다. 평균 연금 수령액이 1억 4700만 원인 데 비해 일시금 평균은 1700만 원에 불과하다.
왜 이렇게 차이가 벌어질까. 답은 단순하다. 중도 인출이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퇴직연금 중도 인출 사유의 절반 이상이 주택 구입(52.7%)이며 이어 주거 임차(27.5%), 회생 절차(13.6%) 순이다. 결혼하면서 전세 자금으로 한 번 쓰고, 내 집 마련 과정에서 다시 쓰다 보니 정작 퇴직 시점에 남는 돈은 크지 않다. 결국 연금이 아닌 소액의 목돈 인출로 끝난다. 눈앞의 문제는 해결돼도 복리의 시간은 완전히 사라진다.
단순한 투자 실험을 보자. 철수는 결혼·주거·자녀 교육·은퇴 비용을 각각 5년 단위로 나눠 매월 100만 원씩 투자했다. 그리고 각 단계가 끝날 때마다 전액을 인출했다. 이를 20년간 반복했다. 반면 영희는 같은 100만 원을 각 생애 이벤트별로 25만 원씩 나눠 20년 동안 꾸준히 투자했다. 연 6% 수익률은 동일했지만 결과는 극명하게 갈렸다. 철수의 최종 수익은 약 2500만 원에 그친 반면 영희의 수익은 2억 1000만 원에 이른다. 같은 돈이라도 시간의 배치가 다르면 복리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퇴직연금이 중간에 빠져나가는 순간, 은퇴는 준비 대상이 아니라 항상 뒤로 미뤄도 되는 선택지가 된다.
퇴직연금은 본래 은퇴 준비 자금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세 보증금이나 주택 마련을 위한 보충 계좌처럼 쓰인다. 이는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계획의 부재에 가깝다. 생애 이벤트별로 자금을 미리 나눠 동시에 투자한다면 퇴직연금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회초년생 시기부터 결혼, 주거, 자녀, 은퇴라는 네 개의 바구니에 자금을 함께 담아야 한다. 금액이 적더라도 은퇴 바구니만큼은 비워두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시간을 길게 가져갈수록 복리는 조용하지만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
정부와 금융회사도 생애주기별 재무설계를 특별한 서비스가 아닌 기본 서비스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 퇴직연금이 제 기능을 하려면 가입자 개인의 행동이 바뀌어야 하고 그 행동을 유도하는 시스템이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 결국 인생을 갈라놓는 것은 돈의 크기가 아니다. 시간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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