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정밀 지도의 해외 반출 여부가 국가 안보와 산업 주권을 둘러싼 최대 현안으로 부상했다. 이 논의는 지도가 단순한 길 안내를 넘어 국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략을 담아내는 압축된 기록임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고정밀 지도는 좁은 골목의 굴곡과 건물의 윤곽까지 담아내는 살아 있는 정보의 총체로,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 기술 주권을 떠받치는 핵심 전략 자산이다. 이 데이터가 국경을 넘어 반출된다면 단순한 정보 유출을 넘어 국가 산업 생태계 전체를 외국의 손에 넘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
7월 31일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되었지만, 고정밀 지도 반출 문제는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않았다. 대통령실은 이를 우리가 방어한 것이라고 밝혔으나, 8월 11일로 예정된 정부의 최종 결정과 한미 정상회담 등 후속 논의가 남아 있어 신중론이 제기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고정밀 지도 반출 문제를 단순한 기술 논의를 넘어 한미 통상 협상의 핵심 의제로 끌어올렸다. 이는 지난 3월 미국의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NTE)'가 한국의 고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디지털 무역 장벽으로 지목한 이후 이어진 압박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며,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국의 디지털 규제가 협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지적하며 미국 측 압박이 거셀 것임을 시사했다.
일부 해외 기업들은 한국이 유일하게 고정밀 지도 반출을 제한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현행 공간정보관리법은 1:25,000 축척보다 세밀한 지도의 해외 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이는 군사적 악용을 막기 위한 조치다.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등 여러 국가가 같은 이유로 제한을 두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수십년간 막대한 국민 세금으로 완성된 고정밀 지도는 국가의 공공 자산이다. 이 전략 데이터를 해외로 넘기는 순간, 중국이나 러시아 등 다른 국가의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사라진다. 더 큰 문제는 해외 빅테크가 이 자료를 확보하는 순간, 중소기업 중심의 국내 공간정보 산업이 기술 종속과 기반 붕괴라는 이중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경우, 자율주행, 드론, 스마트시티 등 미래 핵심 산업의 주도권 역시 해외 기업에 내줄 수밖에 없다. 2030년 전 세계 공간정보 시장 규모가 약 24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지금, 이는 단순히 시장을 양보하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스스로 미래 성장 동력에서 퇴출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국가가 직접 제작 및 관리하는 고정밀 지도는 단순한 위성 사진을 넘어선 통합 데이터다. 이 정보가 해외로 유출되면 주요 시설의 위치, 지형 연계성, 진출입로, 특정 시간대의 움직임 패턴까지 종합 분석되며 잠재적 안보 리스크가 폭발적으로 확대된다. '보기'를 넘어 '분석'과 '활용'으로 그 가치가 확장되는 만큼, 고정밀 지도의 해외 반출은 곧 데이터 주권의 포기를 의미한다. 분단국가인 한국의 특수한 안보 환경을 고려해 국내 지도 서비스 기업들은 군사 시설을 흐리게 처리하거나 저해상도화하는 등 엄격한 보안 조치를 적용해왔다. 이러한 합리적 장치를 무력화하고 데이터를 해외로 넘기는 것은, 안보와 데이터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외국인 관광 편의나 산업 활성화를 명분으로 개방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해외 사례들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한다. 프랑스와 호주는 정부의 데이터 개방 정책으로 인해 자국 지도 서비스가 구글에 시장 주도권을 빼앗겼고, 자국 플랫폼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특히 일본의 경우, 지도 스타트업 '젠린'이 구글과 협력했으나 갑작스러운 계약 해지로 기업가치가 3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하는 충격을 겪기도 했다. 이처럼 데이터 개방은 장기적으로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해외 빅테크 종속이라는 위험을 보여준다.
고정밀 지도는 더 이상 단순한 상업적 데이터가 아니다. 이 전략 자산은 결코 단기 외교 성과를 위한 협상 카드가 될 수 없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은 되돌릴 수 없는 국가적 손실로 이어진다. 국토의 정밀 데이터는 반드시 대한민국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하며, 이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정부의 현명한 결정이 국가 안보와 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고정밀 지도는 단순한 기술이 아닌 데이터 주권의 문제이며, 국토 안보와 직결되는 핵심 자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용철 국립부경대 교수·전 대한공간정보학회 회장 suh@pk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