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1980년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던 왕방연의 시조입니다. 이 시조에 곡을 붙여 조용필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요. 학교 시험이나 학력고사에 자주 나왔던 시조인데요. 여기에서 ‘님’은 조선의 임금 중 가장 슬픈 사연을 갖고 있는 단종을 말합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후 사방이 강과 절벽으로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 청령포로 유배되었는데요. 왕방연은 단종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가 돌아오면서 슬픔에 겨워 이 시조를 지었다고 합니다.
단종은 유배된 지 몇 달 후 1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조선의 왕 중 가장 단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왕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단종의 왕비는 정읍시 칠보면에서 태어난 정순왕후 송씨인데, 본향은 여산입니다.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가 위치한 바로 그곳이지요. 개인적으로는 45년 전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면서 난생 처음으로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입니다. 정순왕후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가 15세의 나이로 당시 국왕이던 단종의 비로 간택됩니다. 하지만 1년 후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비에서 물러나 대비가 되었다가 다시 1년 후 서인으로 강등됩니다. 파란만장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요.
종로 쪽에서 신설동 쪽으로 가다 보면 흥인지문(동대문)을 지나 왼쪽으로 야트막한 산이 하나 보입니다. 그 산 끄트머리 부근을 동망봉(東望峯)이라고 부르는데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라는 뜻입니다. 정순왕후는 단종과 헤어진 후 이 부근에 살았는데요. 매일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동망봉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요.
흥인지문 부근에는 유독 정순왕후와 관련된 곳들이 많은데요. 먼저 동망봉에서 북쪽으로 가면 ‘청룡사’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그곳에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가 있는데요. 정업원 옛터에 세운 비석이라는 뜻입니다. 정업원은 왕실과 관련이 있는 여성들이 출가해 거주하던 곳이었는데요. 정순왕후는 서인으로 강등된 후 이곳에서 염색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부근에 있는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는 곳에서 염색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녀가 지초(芝草)라는 자주색 나는 풀로 염색을 해 자주색 물이 흘러내린 데서 연유합니다.
동망동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이르면 ‘영도교(永渡橋)’라는 다리를 만나는데요. ‘영영 이별하는 다리’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졌기 때문인데요. 왕후는 이 다리를 건너 부녀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여인시장에서 염색한 천을 팔아 생계를 이었다고 합니다.
정순왕후는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대까지 살다가 82세의 나이로 그토록 그리워하던 단종의 곁으로 갔는데요. 안타깝게도 영월 장릉에 잠들어 있는 단종과는 멀리 떨어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사릉에묻혀 있습니다. 단종은 숙종 대에 정순왕후와 더불어 복위되었는데요. 사육신을 선양함으로써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려는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일. 아마도 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꿈일 텐데요. 정순왕후는 저승에서나마 낭군을 만나 이승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었을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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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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