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스타트업열전] '드라기 보고서' 통해 본 유럽 창업생태계 강점과 약점

2025-01-21

[비즈한국] 최근 유럽 경제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유럽의 경제를 이끌었던 독일은 ‘유럽의 기관차’라 불리던 위상을 잃고 이제는 ‘유럽의 병자’라는 오명을 쓸 만큼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치적 상황도 불안정하다. 나치당에 비교될 만큼 극우로 분류되는 AfD(독일을 위한 대안)가 2024년 유럽의회선거에 이어서 독일 주의회 선거에서도 상당한 의석수를 차지하면서 정치적 불안감이 상승하고 있다. 얼마 전 일론 머스크가 이 정당을 공개 지지하면서 2월에 치러질 조기 총선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되어 안팎으로 시끄러운 형국이다.

현재 유럽연합(EU) 전체의 GDP는 약 19.4조 달러(2경 8000조 원)로, 미국의 27.36조 달러(3경 9600조 원)에 크게 뒤처졌다. 2008년에는 양쪽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지난 16년간의 격차는 유럽 경제의 침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리콘밸리와 비교되는 유럽의 창업 생태계

기술, 창업, 스타트업 생태계를 말할 때 실리콘밸리를 빼놓을 수 없다. 1939년 휼렛과 패커드가 사업을 시작한 허름한 차고는 실리콘밸리의 탄생지로, 캘리포니아 역사유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학 중퇴 창업자, 차고에서의 개발, 스탠포드대학교 같은 학계와의 활발한 산학 협력은 실리콘밸리의 상징이 되었다. 이미 1950년대부터 성장기에 들어선 실리콘밸리에는 긴 역사를 통한 성공과 실패의 인프라가 있기에 유럽의 창업 생태계와 직접 비교하는 것부터가 어쩌면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오랜 시간 유럽은 미국을 견제하며 어떻게 유럽만의 장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최근 유럽 경제의 침체는 그 노력이 과연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재고하는 계기가 됐다.

2024년 9월 9일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EU 경쟁력 보고서’에서 유럽 경제가 직면한 주요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먼저 ‘혁신 격차’를 강조한다. 유럽은 기술 혁신에서 미국과 중국에 뒤처졌고, 이는 디지털 및 청정 기술 분야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또 높은 에너지 비용은 유럽 기업들의 경쟁력을 저하시키고, 특히 청정 에너지로의 전환이 지연되면 문제가 더욱 심화될 수 있다.

세 번째로 유럽은 반도체와 같은 핵심 산업 분야에서 외부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공급망이 취약하고, 경제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 네 번째로 유럽의 생산성 성장률은 정체되어 있으며, 이는 경제 성장과 생활수준 향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섯 번째, 노령화와 인구 감소가 노동력 부족과 경제 성장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 여섯 번째, 복잡한 규제와 관료주의는 기업 활동을 저해하고, 특히 스타트업과 혁신 기업들의 성장을 방해한다. 일곱 번째, 유럽은 국방 및 외교 정책에서 자주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이는 글로벌 무대에서 영향력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드라기 보고서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간 7500억~8000억 유로(1121조~1195조 원)의 추가 투자를 제안한다. 이를 통해 유럽의 경제 구조를 재편하고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추가 투자가 없다면 유럽은 새로운 기술 개발과 기후 책임, 그리고 세계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드라기 보고서는 지난 11월 출범한 ‘폰데어라이엔 2기’ 유럽연합 집행부의 정책 수립 과정에 반영될 예정이다. 따라서 유럽 각계 각층에서는 이 보고서 내용을 두고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다. 기업규제 부담완화에 대한 내용은 기업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상반된 반응도 나왔다. 유럽노동조합연맹(ETUC)은 노동자와 노동조합 권리를 보호하는 규제 환경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드라기 보고서를 비판했고, 유럽환경국(EEB)도 청정산업을 위한 협정이 규제 완화의 방식으로 가는 것은 유럽의 생태학적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을 간과한 분석이라고 비판했다.

#유럽 창업자들 “우리는 언제 미국처럼 될까”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왜 유럽은 미국같이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목소리가 많았다. 최근 링크드인에서는 유럽 창업 생태계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두고 논쟁이 활발하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미국은 대규모 단일 시장을 통해 혁신을 촉진하지만, 유럽은 국가별로 분산된 시장 구조로 인해 성장이 저해되고 창업가들이 각국의 규제를 극복해야 하는 부담을 초래한다. 두 번째로 유럽은 기술적으로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디지털 경제를 구축하지 못했다. 세 번째로 유럽에는 현재 1조 달러(1451조 원) 규모의 기술 회사가 없다. 스포티파이, SAP와 같은 성공한 테크 기업이 있지만, 어느 회사도 미국에서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이 달성한 1조 달러 이상의 가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유럽 출신 1조 달러 기업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이 높았던 스카이프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되어 미국의 성과가 되었다. 이는 후기 단계 스타트업에 대한 유럽 생태계의 자본 조달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가 되었다. 

2023년 유럽 스타트업에 투자한 VC 자금의 규모는 520억 달러(74조 원)였다. 미국 스타트업 투자금은 이의 3배에 달한다. 2024년에도 이 상황은 지속됐다. 계속되는 인플레이션과 이자율 상승으로 전체 자금이 감소하면서 유럽 투자자는 매우 신중한 경향을 보였다. 약 9조 달러(1경 2920조 원)의 자산을 관리하는 유럽 연금기금은 VC 부문에 약 0.01%만 할당한다. 유럽 내에서 자금 조달 기회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거대 자본이 지원해야 하는 후기 단계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유럽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런던의 자율주행 스타트업 웨이브(Wayve), 파리의 미스트랄 AI(Mistral AI), 쾰른의 딥엘(DeepL) 등과 같은 후기 자본이 필요한 유명 스타트업들이 모두 미국 투자자들을 우선적으로 접촉하는 이유다. 유럽에서 빅테크 기업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이러한 환경은, 유럽 빅테크 기업이 유럽 스타트업을 인수하며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AI 솔로프러너(AI Solopreneur)를 운영하는 독일 출신 창업자 올레 레만(Ole Lehmann)은 유럽의 창업 생태계를 강력히 비판한다.

그는 2008년 미국과 유럽의 GDP는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그 차이가 더 커졌다며 “유럽이 성장보다는 안보, 규제보다 혁신을 선택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유럽의 인재들은 대체로 두 가지 길을 택하는데, 급여를 더 많이​(테크 분야 평균 연봉인 25만 달러 이상) 받기 위해 미국으로 가거나, 고정비가 적게 드는 동남아시아나 동유럽 분야로 진출해 회사를 창업한다. 이로 이해 많은 인재들이 유럽을 떠나고 있다.

가장 문제는 유럽의 관료주의다. 고용법은 채용도 해고도 어렵게 만들고, 세율은 중소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높다. 유럽의 기술 성공사례로 꼽는 스포티파이도 본사를 뉴욕으로 이전해 뉴욕에서 상장했고, ARM은 엔비디아에 인수되었으며, 클라르나(Klarna)도 미국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유럽이 과거를 보존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미래를 만드는 데는 형편없는 박물관 같다”고 비판했다. 올레 자신도 독일을 떠나 사이프러스에서 사업을 구축했다.

#유럽만이 가능한 것도 있다

이와는 다른 시선도 있다. 베를린 핀테크 스타트업 하이포프렌드(Hypofriend)의 대표 닉 뮬더(Nick Mulder)는 유럽이 단점만 가진 곳이 아님을 강조한다.

뮬더는 창업자와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일뿐만 아니라 ‘삶’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려면 유럽이 미국보다 훨씬 더 매력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업 생태계에서 ‘유럽은 망했다(Europe sucks)’고 말하는 사람들은 스타트업 창업자나 종사자를 ‘어리고, 기술 분야에 있으며, 싱글에 아이가 없는 남성’을 상정한다며, 나이가 좀 있고 가족이 있는 창업자들에게 유럽은 여전히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유럽은 미국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고품질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출산휴가, 육아휴직, 무상교육, 유급 휴가 등 가족 친화적인 제도를 운영한다. 독일 베를린은 샌프란시스코에 비해 생활비가 78% 낮으며, 특히 주택 비용과 교육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유럽을 바라볼 때 동유럽을 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유럽의 몰락을 얘기하는 측에서 상정하는 유럽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인데, 최근에는 동유럽, 특히 폴란드가 유럽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다.

1989년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난 폴란드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 낮은 세금, 간소화된 규제, 높은 노동 윤리를 바탕으로 폴란드는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투자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0억 달러를 투자했고, 구글은 주요 R&D 센터를 설립했으며, 인텔도 새로운 반도체 센터 설립 계획을 갖는 등 글로벌 대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며 폴란드는 유럽 내에서도 독보적인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폴란드는 한국과 싱가포르 등 빠르게 성장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장점을 모두 갖춘 유럽국가로 서유럽 주요국이 배워야 하는 장점을 많이 가진 ‘잠자는 거인’이며, 유럽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 기업 해외 진출 시 잘 따져봐야

이러한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한국 기업의 글로벌 진출 전략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미국은 높은 혁신성과 성장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규제 완화와 기회의 땅이라는 점에서는 동유럽, 특히 폴란드 같은 시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면 유럽의 사회 복지와 안정성은 장기 투자와 가족 단위의 정착을 고려하는 기업들에게 매력적이다.

글로벌 진출의 이유를 물으면 막연하게 ‘모두가 미국을 가기 때문에’ 혹은 ‘예전부터 유럽이 좋아서’라고 말하는 한국 창업자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럴 때, 다른 무엇보다 앞으로 그들이 겪게 될 고난과 역경이 먼저 보인다.

결론적으로, 유럽이 미국처럼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단순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의 영역에 따라 시장이 얼마만큼 열려 있는지, 관련 인증과 규제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회사를 설립하고 창업자나 담당자가 회사 안착을 위해 초기에 들여야 하는 시간과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하게 따져보고 선택할 필요가 있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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