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김정은 전사로 살자!” 충북 선거 나온 그들의 ‘혈서’ [남북 스파이 전쟁 탐구 4부-⑦]

2025-04-30

남북 ‘스파이 전쟁’ 탐구

〈제4부〉스파이 잡기 30년, 하동환 전 국정원 대공수사단장의 비망록

2017년 5월 21일 오전 10시. 수요일인 이날 중국 베이징의 대학가 거리는 여느 때처럼 평온했다. 베이징사범대학 남소문 앞 인파 사이로 50대의 남성 한 명이 무심히 걸었다. 왼손에는 신문, 오른손엔 투명한 생수병이 들려 있었다. 어깨에 검은 가방을 걸친 그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외국인 관광객과 다를 바 없었다. 남자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생수병을 살짝 돌리며 뒤를 흘끗 확인했다. 누군가 따라오고 있는 건 아닌지 경계했다. 몸에 밴 습관이었다.

순간, 백발의 또 다른 남성이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신문을 든 남성은 백발의 남성을 4~5m 간격을 두고 뒤따라갔다. 사범대 내 건물을 한 바퀴 돈 두 남성은 편의점 앞에서 택시에 함께 탑승했다. 21분 뒤 그들은 공상은행 건너편에서 하차했다. 3~4m 거리를 두고 걷던 중 백발의 남성은 고개를 돌려 신문을 든 남성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스파이에게 건네진 북한 공작원 명함 한 장

명함을 건네준 남성은 북한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이었다.(※북한의 대남 공작부서 명칭은 문화연락부→대남연락부→사회문화부→대외연락부→225국(대외교류국)→문화교류국으로 계속 바뀌고 있다.) 대외연락부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한 한 탈북민은 2023년 12월 법정에서 이 접선 장면이 찍힌 동영상을 보고 북한 공작원에 대해 이같이 증언했다.

동영상에 등장한 북한 공작원의 이름은 조일운(여권상 나이 56세)이다. 국가정보원은 당시 접선 현장을 사전에 정찰하고 자리를 뜬 거물급 북한 공작원 한 명을 추가로 확인한다. 리광진(여권상 나이 64세)으로 1990년대 모자(母子)·부부 공작조로 위장해 두 차례 남한에 침투한 공로로 북한에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두 번 받은 전설적인 인물로 수사 당국에 알려져 있다.

이 대목에서 ‘남북 스파이 전쟁’ 취재팀은 1부 주인공인 남파간첩 김동식(62)씨를 다시 떠올렸다. 그도 같은 시기에 남한에 침투해 거물 간첩 이선실(1916~2000)과 함께 복귀에 성공해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공화국영웅 칭호는 신분의 수직상승과 동의어다. 공작원의 경우 차관급 대우를 해준다. 김동식은 “북한군 장성들이 군복에 줄줄이 단 국기훈장 100개를 달더라도 공화국영웅 칭호 하나만 못하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중국과 캄보디아에서 한국의 자생 스파이와 접촉한 리광진의 모습과 2015년 북한 중앙조선TV에 그가 나왔던 영상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김동식은 2024년 1월 이번 사건의 법정 증인으로 출석해 리광진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북한 대남공작원을 양성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학생들끼리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밀봉(密封) 교육을 한다. 공작 임무 수행 중 체포되거나 신분이 노출될 경우 다른 공작원들의 신상을 누설하지 못 하게 하려는 예방조치다. 남한의 언어와 풍습을 가르치는 적구화(敵區化) 교육을 받을 당시에는 평양 인근 초대소에서 인근 매점에 도보로 이동할 때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와 검정색 우산을 쓸 정도였다. 김동식도 당시에는 ‘박승국’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북한 공작원 리광진은 충북 청주에서 활동하던 남한 노동가들을 위와 같이 중국 베이징으로 불러 스파이로 포섭했다. 2021년 8월 세상에 공개된 충북동지회 사건이 시작된 배경이다. 리광진에게 포섭된 충북동지회 회원 4명 중 3명은 지난 3월 대법원에서 징역 2~5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나머지 1명은 지난해 9월 1심에서 징역 14년 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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