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을 나와 창업한 사업이 한창 부침을 겪던 2010년, 교통사고가 부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남편 이병륜씨는 장애 1급 판정을 받았고, 치매를 앓던 시아버지와 남편을 돌보던 아내 문정연씨는 이듬해 골육종으로 골반 수술을 받아 목발에 의지하는 지체장애인이 됐다. “그 이하로 더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는 회고처럼, 나쁜 일은 한꺼번에 닥쳐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시 일어섰다. 젓가락질조차 힘들던 남편은 20여년 전 딸의 탄생을 담았던 카메라를 다시 들었고, 아내는 붓을 잡았다. 예술이 그들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냈다.
지난 24일 서울 강남장애인복지관에서 만난 부부는 한창 작품 활동 중이었다. “몸은 많이 움직이지 못하지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많아요.” 휠체어 높이 1m에서 세상을 바라보지만, 이병륜 작가의 사진은 “도대체 어떻게 찍은 거냐”는 감탄과 함께 다른 사람이 찍었느냐는 오해를 부를 정도로 스펙트럼이 넓다. 그는 회화와 서예, 사진을 넘나드는 다재다능한 작가다.

문정연 작가는 남편을 따라 복지관에서 그림을 배우다 서양화의 매력에 빠졌다. 처음 응모한 JW아트 어워드에서 입선하며 일찌감치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재활 운동으로 시작한 수영을 통해 느낀 자유로움을 ‘물의 흐름’이라는 주제로 풀어내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인생의 사나운 격랑을 거스르기보다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흐름에 몸을 싣는 작가의 자세가 담겨 깊은 울림을 준다. 지난 7월에는 수영장의 물결을 표현한 ‘흐름의 자유2’로 제8회 이원형어워드를 수상했다.
“프로 작가는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죠. 아마추어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덕분에 전문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어요.”
평범한 일상이 사라진 시간에 취미 삼아 그림을 시작한 부부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하 장문원) 덕분에 전문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병륜 작가는 2016년 장문원의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이음버디’에 참여하면서 예술가로서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멘토 예술가와 장애인이 함께 여행하며 문화예술의 의미를 탐구하는 프로그램이다.
뒤늦게 서울디지털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며 학구열을 불태운 문정연 작가는 미디어아트과정, 장애예술 유통 매개자 과정 등 장문원의 ‘이:음 예술창작 아카데미’를 적극 활용했다. 교육과정 참여 후 텀블벅으로 MD 상품 펀딩 도전에도 나섰다. 지난해에는 장애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돼 온·오프라인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지난 10년간 부부의 삶은 예술과 함께 쉼 없이 흘러왔다. 오는 11월9일부터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아트프리즘’뿐만 아니라 각종 아트페어와 공모전에 참여하고 있다. “장애 예술인 작업 공간과 수장고가 더 확충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처럼 창작 의지도 여전히 왕성하다.
이음아트플랫폼은 부부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창구가 되어줬다. 서해 갯벌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포착한 이 작가의 사진 ‘정적 속의 비상’은 이 플랫폼을 통해 판매됐다. 이 플랫폼은 국가와 지자체, 공공기관이 장애 예술인의 창작물을 우선 구매할 수 있도록 장문원이 마련한 온라인 매매 채널이다. 미술품, 공예품, 공연 등 장애 예술인의 주요 작품과 기획 의도를 온라인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병륜 작가는 한때 장애인체육대회에서 은메달을 두 차례 수상한 론볼 종목 선수였다. 그러나 경추 장애로 인한 체온 조절의 한계로 운동을 접고 예술에 더욱 몰입하게 됐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서예 초서 작업뿐만 아니라 아크릴화에 낙관을 찍는 등 동양화와 서양화의 융합을 추구하며 작품 세계를 확장해가고 있다. 현재 포스코플로우 소속 장애인 예술가로 그림을 그리면서, 장애인 사진작가 모임인 ‘휠체어 탄 풍경’, 한국사진가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넉넉하진 않지만 직업 작가로 효능감을 느끼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쉰 살 넘어 장애인이 되어 미술을 했다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잖아요. 애초에 강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뒤늦게 공부해 활동하는 제 경험을 나누고 싶었어요. 예술이 제 자존감을 회복시켰고, 사회 속에서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힘을 주었어요.”

문정연 작가는 물의 흐름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이어가며 ‘이:음 예술창작 아카데미’ 장애예술인 강사 양성과정에 참여 중이다. 장문원을 통해 혜택을 받은 만큼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의지에서다. 이 작가도 한 달에 한 번 캘리그래피 강사로 재능기부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선한 영향력의 선순환이다.
공대생과 사범대생으로 만나 4년 열애 끝에 1988년 결혼한 부부는 전우애와 동료애로 끈끈하다. 예술가의 자존심으로 티격태격할 때도 있지만, 누구보다 솔직하게 서로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이 작가는 아내의 강점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집중력”으로, 문 작가는 “한번 시작했다 하면 끝을 보는 끈기”를 남편의 강점으로 꼽았다.

2026년, 부부는 남편의 칠순을 기념하는 2인전을 준비 중이다. 삶이 무너졌던 자리에서 다시 꽃핀 예술이, 이제는 두 사람의 세 번째 인생을 그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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