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인터넷신문]1인 창무극(唱舞劇)의 병신춤의 명인 공옥진(1931–2012) 선생은 남도의 바람 속에서 예술과 인생을 함께 빚은 사람이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영광, 승주(순천), 광주 등 여러 주장이 있으나, 본인은 방송에서 “광주에서 태어났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가 예인(藝人)으로 완성된 무대는 분명 영광이었다. 영광은 그에게 예술의 터전이자 인생의 마지막 고향이었다. 공옥진의 할아버지 공창식은 한국 최초의 국립극장인 협률사 단원으로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었고, 아버지 공대일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흥보가’ 예능보유자였다.
공옥진은 네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다. 일제 말, 아버지가 징용을 피하기 위한 비용 마련 때문에 어린 공옥진은 “돈 천 원에 일본으로 팔려갔다.” 그는 최승희 무용단의 몸종으로 보내져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굶주림과 멸시 속에서도 그는 최승희의 춤사위를 몰래 따라 하며 몸으로 예술을 익혔다. 해방 후 귀국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가족과 헤어지게 되면서 여러 걸인들을 만났고, 신체장애가 있는 걸인들도 만나게 되었다. 이런 동료들과 돌아다니면서 이들이 신명나게 춤을 추며 동냥하는 모습들이 일반인과는 다르게 손과 발을 뒤틀거나, 꼬고, 다시 풀어헤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고 익히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가 영광에서 거주하면서 광주협률사 단원과 광주 권번 선생으로 있을 때 영광에서 살면서 다시 판소리 ‘심청가’를 배우기 시작하여 14세 때 1946년 군산명창대회에서 1등, 1947년 고창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후 1948년 임방울에게서 판소리지도를 받았다. 결혼은 했으나 파탄되자 지리산 천은사로 들어가 삭발하고 ‘수진(秀眞)’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그러다 다시 속세로 돌아와 삶의 무게를 예술로 견뎌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영광읍에서‘옥진관’이라는 식당을 열었고, 계속해서 노래와 춤을 췄다.
“사람들은 내 춤을 병신춤이라고 하는데, 그거 아니여. 곱사춤이여.”라고 생전에 말했던 공옥진. 벙어리 동생과 곱사등의 조카가 있었던 공옥진은 장애인을 식당에 불러 밥을 나누었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놀았다. 그리고 장애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곱사춤(병신춤)을 만들어 추었다. 곱사춤은 조롱이 아니라, 세상에 밀려난 이들의 슬픔을 몸으로 끌어안는 위무의 예술이었다. 굽은 허리와 뒤틀린 동작, 익살과 눈물이 함께 섞인 그의 춤은 서민의 비애를 유머로 승화시킨 남도의 예술 그 자체였다. 1970년대 영광 장터에서 그가 공연하던 모습을 본 무용학자 정병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제안으로 1974년 서울 안국동의 소극장 ‘공간사랑’ 무대에서 『심청가』를 1인 창무극 형식으로 공연했고, 대중은 열광했다. 그의 무대는 노래·춤·연극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었다. 그때부터 공옥진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그는 ‘1인 창무극의 창시자’로 불리게 되었다. 영광에 정착한 공옥진은 지역 축제와 문화행사에 참여하며, 남도의 예술을 이어갔다. 1974년 영광군이 남도문화제 전국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을 때, 무형문화재 발굴과 연출을 맡았던 이가 바로 공옥진이었다. 그의 예술은 영광 사람들의 손끝과 마음속에서 살아 있었다.
그의 노력이 뒤늦게 평가받은 것은 2010년이었다. 공옥진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9-6호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영광군에서는 한때 천시받았던 ‘병신춤’이 남도의 문화유산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는 이듬해 국립극장에서 ‘한국의 명인명무전’ 무대에 올라 살풀이춤을 추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는 1979년 영광군이 영광읍 교촌리에 세워준 '공옥진예술연수원'에서 살며 제자를 양성했다. 1998년과 2004년 두 차례의 뇌졸중을 겪고 교통사고까지 당했지만 끝까지 예술을 놓지 않다가 2012년 7월 9일, 영광기독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공옥진의 삶은 영광의 모시떡과 닮았다. 모시는 거칠고 질긴 섬유다. 수없이 삶고 다듬어야 비로소 곱고 단단한 결을 낸다. 모싯잎송편 또한 데치고 다져 쌀가루에 섞어 찌는, 인내의 음식이다. 조선 시대에는 음력 2월 초하루를 ‘머슴날’이라 하여 봄 농사가 시작되기 전 주인이 노비들을 격려하고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베풀었다. 이날 노비들에게 먹인 떡이라 하여 ‘노비송편’으로도 불린다. 이러한 내용은 1849년 홍석모(洪錫謨, 1781~1857)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지은 『경도잡지(京都雜誌)』에도 “이월 초하루에는 대보름날 세워 두었던 화간(禾稈)을 풀어내려 솔잎을 깔아 떡을 만들어서 노비들의 나이만큼 먹인다”라고 하였다.
모시떡은 인절미처럼 고급떡이 아니라 서민의 음식이었고, 전라도, 경상남도, 충청도 지역에서는 흔한 떡이었으나 영광군에서는 이 떡을 지역의 상징으로 키워냈다. 모시 재배 농가와 가공업체가 100곳이 넘으며, 연 매출은 300억 원을 돌파했고, 종류와 맛도 다양화했다. 모시떡은 단순한 전통식품을 넘어 지역의 자부심이자 문화산업으로 성장했다. 한때 멸시받던 공옥진의 춤이 무형문화재로 되고, “웃으면서 울게 만드는 춤”, “슬픔이 웃음으로, 웃음이 눈물로 번지는 무대”로 사랑을 받았듯 천시받던 모시떡이 명품 특산물로 승화된 것이다.
공옥진의 춤은 인간의 존엄을 복원했고, 영광의 모시떡은 농촌의 자존을 되살렸다. 공옥진이 가난과 불편함 속에서도 자신만의 빛을 만들어 낸 것처럼 영광 사람들은 모시떡을 남도의 생명 예술로 빚어내고 식문화의 자존심으로 만들었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해남 녹우당과 윤씨 고택 그리고 해남 닭요리.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30).
허북구. 2025. 대한민국 격동기 기록사진가 이경모와 광양 재첩요리.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29).
한효심, 허북구. 2023. 떡 재료 식물인 떡쑥, 모시, 쑥 및 절굿대 추출물의 생리활성 효과. 한국지역사회생활과학회지 34(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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